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델로니어스 몽크가 ‘민턴스 플레이하우스’(재즈 클럽)에서 잼 세션을 하며 비밥을 만들고 있던 1940년대 초중반의 어느 날, 10대 후반의 어린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올랐다. 몽크의 영향과 격려 속에서 등장한 피아니스트는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무거운 왼손 움직임을 걷어내고 오른손으로 단선율을 빠르게 연주했다. 그 연주는 찰리 파커나 디지 길레스피 같은 관악기 연주자가 들려준, 화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로 질주하던 비밥의 어법을 피아노로 옮긴 듯한 것이었다. 비밥의 언어에 피아노의 목소리가 또렷해진 순간이었다. 그 연주자의 이름은 버드 파월이었다.
하지만 재즈의 역사를 바꾼 이 극적인 등장 뒤에는, 화려한 선율보다 더 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삶은 천재와 광기, 창조와 파괴, 예술과 고통이 얽히며 추락으로 마무리된 비극적 서사였다. 경찰의 폭력, 정신병원의 전기충격 치료, 약물과 알코올로 인한 41세의 이른 죽음으로 끝난 그의 삶은 재즈의 어두움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어두움 속에서 만들어진 그의 음악은 모순되게도 비밥이 찬란한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글 낯선 청춘
일러스트 이은다연
할렘의 어린 천재
1924년 9월 27일,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얼 루돌프 파월(Earl Rudolph Powell)은 음악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스트라이드 피아니스트였고, 형 윌리엄 파월(William Powell)은 트럼페터였다. 어린 버드는 여섯 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 살 무렵부터 교회 오르간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그를 사로잡은 연주자는 패츠 월러, 아트 테이텀 같은 스트라이드 전통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보다 일곱 살 아래인 동생 리치 파월(Richie Powell)도 함께 피아노를 배웠는데, ‘브라더’(형) 발음을 잘못해 ‘버드’(Bud)란 별명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한편 형 윌리엄은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열여섯 살의 버드 파월을 자신의 밴드에 합류시켜 동생이 전문 연주자의 삶을 꿈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1940년대 초반, 그는 집 근처에 위치한 클라크 먼로의 ‘먼로스 업타운 하우스’(재즈 클럽)에서 델로니어스 몽크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몽크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케니 클락 같은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뉴욕 할렘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에서 스윙의 관습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어법을 만들고 있었다. 어린 버드 파월도 몽크와의 인연을 계기로 이 혁명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피아노로 번역된 비밥
버드 파월 이전의 재즈 피아노는 주로 스트라이드 주법에 기반하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베이스 음과 코드를 번갈아 가며 연주하고, 오른손으로는 화려한 장식음을 곁들여 멜로디를 연주하는 주법이었다. 이것은 피아노를 하나의 독립된 악기, 멜로디, 화성, 리듬 모두를 혼자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만들었다. 그런데 버드 파월은 이 모든 것을 해체했다. 먼저 왼손으로 코드를 간결하게 연주하며 리듬 섹션처럼 작동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여백을 바탕으로 오른손의 자유를 확장했다. 그 결과 오른손은 빠르고 복잡한 단선율 라인을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었다. 이런 연주 방식은 관악기에서 영감받은 것이었다. 특히 찰리 파커 음악에 깊이 매료되어 그의 색소폰 연주를 피아노로 옮기려 노력했다.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악기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작업이었다.
버드 파월의 오른손 연주는 경이로웠다. 매우 빠른 속도로 연주하면서도 각 음은 명확했고, 프레이징은 논리적이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는 비밥의 미로 같은 화성 사이사이를 반음을 이용해 자유롭게 누볐다. 단순히 정해진 음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건반 위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 사이를 촘촘하게 훑어 내려가며 마치 묘기 부리듯 아슬아슬한 쾌감을 선사했다. 리듬에 있어서도 정박자에 발을 맞추는 대신, 박자와 박자 사이의 빈틈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연주를 즐겼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리듬의 파격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비밥만의 질주감을 완성했다.
터치 또한 독특했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타악기처럼 두드렸다. 그 결과 각 음은 마치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명확하고 강렬한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유려한 스윙 시대의 피아노 사운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비밥 피아노의 결정판
이러한 버드 파월의 혁신적인 연주는 1949년부터 1953년 사이의 녹음을 담고 있는 [Jazz Giant](Norgran, 1956), [The Amazing Bud Powell Vol. 1](Blue Note, 1955), [The Amazing Bud Powell Vol. 2](Blue Note, 1956) 등의 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1951년 녹음된
‘Un Poco Loco’는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다. 이 곡에서 그는 아프로-쿠반 리듬 위에서 강력한 힘과 빠른 속도로 제목처럼 미친 듯한 몰아(沒我)의 춤을 춘다. ‘Tempus Fugit’에서의 경이로운 속도감도 놀랍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유래한 라틴어 문구를 제목으로 차용한 이 곡에서 그는 “시간은 화살같이 빠르다”는 뜻에 걸맞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듯 극한의 질주를 거듭하는데 그럼에도 완벽한 통제력을 유지한다. 한편 ‘Ornithology’처럼 찰리 파커의 곡을 연주하면서는 찰리 파커 못지않은 복잡하고 긴장 가득한 솔로를 펼친다.
복잡하고 빠른 연주만 잘한 것은 아니었다. ‘I’ll Keep Loving You’나 ‘Polka Dots And Moonbeams’ 같은 발라드곡에서도 놀라울 만큼 서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과연 경이로운 속도로 질주한 연주자의 연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중한 음의 선택과 과하지 않은 감정 표현으로 섬세한 깊이를 보여준다.
균열의 시작
그런데 앨범만으로 버드 파월의 뛰어남을 확인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의 공식적인 첫 녹음은 만 20세였던 1944년, 쿠티 윌리엄스의 앨범 [Cootie Williams Sextet And Orchestra]였다. 이후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덱스터 고든 등의 앨범에 사이드맨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47년에서야 첫 리더 앨범 [Bud Powell Trio]를 로얄 루스트 레이블에서 녹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급했던 [Jazz Giant] 등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의 앨범들은 모두 그가 건강 이상으로 힘든 시기에 녹음되었다. 1945년 쿠티 윌리엄스 밴드와의 공연 이후 술이 취한 상태로 델로니어스 몽크를 괴롭히는 경찰에 항의하다 경찰봉으로 심하게 머리를 맞았다. 그 결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것은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되는 두통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정신적 문제를 야기했다. 갈수록 그의 정신은 불안정해져 심각한 감정 기복, 기억력 상실, 폭력적인 행동과 망상 증세를 보였다.
결국 그는 치료를 위해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47년 말부터 1948년 초까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정신병원에 있었다. 치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당시 전기충격 치료, 인슐린 쇼크 치료, 향정신성 약물 치료 등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치료라기보다는 야만적인 고문에 가까웠다. 이 치료는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켰고, 그의 창의성과 기교에 큰 타격을 입혔다.
쇠락과 번뜩임
이제 버드 파월의 연주는 완벽한 통제에서 벗어나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익숙한 스탠더드 곡의 일부를 잊거나 다른 조로 넘어가곤 했다. 연주를 갑자기 멈추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한 베이시스트, 드러머가 즉석에서 맞추어 따라가야 했다.
곡의 구조를 잊기도 했다. 1955년에 녹음된 앨범 [The Lonely One]에 담긴 ‘Mediocre’가 대표적이었다. 이 곡에서 그는 코드 진행을 바탕으로 변주하는 기존의 솔로 방식이 아니라 멜로디 자체를 계속 변주하는 방식으로 연주를 이어갔다. 이를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연주 당시 코드 진행을 잊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앞서 최고의 연주로 언급했던, 앨범 [The Amazing Bud Powell Vol. 1]에 담긴 ‘Un Poco Loco’도 쇠락의 예 중 하나였다. 1951년 5월 1일 그는 이 곡을 세 차례 연주했다. 그중 세 번째 연주가 우리가 아는 명연이다. 하지만 앞선 두 연주는 그렇지 못했다. 리듬 감각이 흐트러지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당시 그의 연주가 기복이 심한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천재성의 발현은 우연에 맡겨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Un Poco Loco’나 ‘Tempus Fugit’, ‘Ornithology’ 같은 명연들은 무너져가는 통제력 속에서 간신히 붙잡은 번뜩이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한편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비밥 피아노의 혁신적인 연주 외에 갈수록 안 좋아지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인정하고 이에 적응하며 연주를 펼치려 하기도 했다. 1953년에 녹음되어 앨범 [The Amazing Bud Powell Vol. 2]에 담긴 ‘Glass Enclosure’가 그렇다. 제목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시기를 연상시키는 이 곡은 비밥의 전형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긴장 어린 화성과 행진곡 스타일의 리듬이 출발 지점을 잊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1957년에 녹음된 [The Amazing Bud Powell Vol. 3, Bud!](Blue Note, 1957)에 담긴 ‘Bud On Bach’로도 이어진다. C.P.E. 바흐의 ‘Solfeggietto’를 바탕으로 자신의 솔로를 붙인 이 곡은 비밥의 전형과 거리를 두면서도 비밥의 번뜩임을 떠올리게 했다.
파리에서 찾은 안식
1945년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한 이후 버드 파월은 공권력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 속에 살았다. 게다가 당시 뉴욕은 공연 허가증에 해당하는 카바레 카드 제도를 시행하며 전과가 있거나 약물 문제가 있는 연주자에게는 공연 허가를 주지 않았다. 이 제도로 생계에 큰 위협을 느꼈다. 나아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유럽은 달랐다. 유럽은 재즈를 현대 예술로 받아들이며 많은 연주자를 환대했다.
이에 버드 파월은 195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 프랑시스 파우드라(Francis Paudras)라는 헌신적인 팬을 만났다. 후에 [La Danse Des Infidels]라는 버드 파월에 대한 회고록을 쓰기도 한 그는 버드 파월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그의 건강을 돌보며, 그가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는 후에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1986년도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의 소재가 된다.)
그 덕에 버드 파월은 파리에서 약 5년간 안정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파리에 있는 블루노트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는 한편 유럽 곳곳을 돌며 활동했다. 이와 함께 앨범도 녹음했다. [Bud Powell In Paris](Reprise, 1963)가 그중 하나였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재정적 지원을 하고 듀크 엘링턴이 제작을 담당했던 이 앨범에 담긴 그의 연주는 초기 시절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가 제시했던 비밥 스타일의 전형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그만큼 편안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보였다. 그가 파리에서 일상의 평온을 누리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안정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안 좋아졌다. 특히 보호자 자격으로 그와 함께 파리로 건너간 여자 친구 알테비아 버터컵 에드워즈는 통제와 방임을 오가며 그를 약물로 관리하려 했고 이것이 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점점 뉴욕을 그리워했다. 그러던 중 카네기홀에서 열리는 찰리 파커 추모 공연에 참가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이에 5년여의 파리 생활을 접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고독한 귀환과 마지막 날들
1964년 8월 뉴욕으로의 귀환은 화려했다. 복귀와 함께 버드랜드 클럽에서 장기 공연을 시작했다. 그리고 9월에 카네기홀에서 열린 찰리 파커 추모 공연에도 참가했다. 관객들은 비밥의 영웅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하지만 연주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빛나는 순간은 있었지만, 연주 전반은 분명히 쇠락의 징후를 드러냈다. 이듬해 3월에 열린 찰리 파커 추모 공연과 5월에 있었던 타운 홀 공연에서는 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새로운 앨범 녹음도 시도했지만, 연주력 저하로 인해 앨범 발매로 이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따뜻한 환대와 응원이 있었던 평온한 파리와 달리 비정한 착취와 이용이 난무하는 거친 뉴욕의 환경은 그의 건강을 더 악화시켰다. 병원을 오가는 일이 다시 잦아졌다.
결국 1966년 7월 31일, 버드 파월은 뉴욕 브루클린의 한 병원에서 결핵, 영양실조, 그리고 알코올 중독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한 살이었다.
에필로그
버드 파월의 삶은 분명 비극적 서사의 전형에 가깝다. 그가 남긴 기록들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려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삶이라는 전쟁에서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투쟁 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를 단순히 시대와 환경의 희생자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가 겪은 고통과 광기, 그리고 그로 인해 무너져간 연주력의 파편들마저 재즈라는 예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라는 악기에 관악기의 생명력을 이식했고, 현대 재즈 피아노의 문법을 사실상 단독으로 정립했다. 오늘날 무대 위에서 오른손으로 비밥 솔로를 펼치는 모든 피아니스트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파월의 어휘 속에서 연주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기교의 과시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붕괴시키던 세계에 맞서 건반 위에서 이어진 투쟁의 기록이었다.
결국 버드 파월은 비밥이라는 언어가 완성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육체는 마흔한 살에 멈췄고, 손가락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어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재즈 클럽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오래 살지 못했지만, 그가 만든 언어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연주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