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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힙합] 마일스 데이비스 [Doo-Bop]  
제목 [재즈×힙합] 마일스 데이비스 [Doo-Bop]   2016-10-10


재즈 파이오니어의 마지막 정규 앨범


마일스 데이비스 [Doo-Bop]


1991년 초, 마일스 데이비스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자 도시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온갖 잡음, 사람들의 대화 소리 등등, 인위적인 소리와 그렇지 않은 것들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가 데뷔했던 4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그는 재즈의 중심축이었다. 재즈의 황금기를 경험하기도 했고, 재즈가 음악계 피라미드 최하단까지 몰락하는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그는 재즈와 대중음악을 오가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그도 재즈가 더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까지 갔다는 걸 알았다.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욕이었지만,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건 랩이었다. 잠시 고민을 했던 그는 당시 최고의 힙합 레이블이었던 데프잼(Def Jam Recordings)의 대표 러셀 리몬스(Russell Simmons)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밥에서 포스트밥까지


알다시피 마일스 데이비스는 스윙의 시대에 태어나 비밥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뮤지션이다. 실은 클래식 교육을 받았으며, 세인트루이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단원에게서 트럼펫을 배우기도 했다. 아버지가 치과의사였던 덕분에 유복한 삶을 살았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것인지 1944년에는 줄리아드 음악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뉴욕은 그에게 음악의 도시였다. 그에게 뉴욕은 클래식이 아닌 재즈의 도시였다.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이끄는 비밥의 흐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뉴욕에 오기 전부터 재즈 밴드에서 활동했던 연주자였다. 세인트루이스에서도 나름의 경력을 쌓고 있었고, 덕분에 찰리 파커를 비롯한 비밥 연주자들에게 픽업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재즈의 중심축에서 활동하게 되자 클래식 공부에선 멀어지게 되었다. 백인 중심적이며 인종차별적인 클래식 교육에 진절머리가 났다고 고백했다. 그는 줄리아드에서 자퇴할 계획이었다. 가까스로 부모를 설득해서 1년 만에 학교에서 자퇴하고 만다. 이 시기에 그는 찰리 파커의 밴드 정규 멤버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찰리 파커의 룸메이트기도 했다.


이후 그는 모던재즈의 중심축으로 성장했다. 클래식 음악과 아마드 자말을 비롯한 연주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웨스트코스트 재즈씬의 중심축이 되기도 했고, 비밥을 가다듬은 하드밥 흐름에 포함되기도 했다. 모던재즈에 이어 등장한 프리 재즈에는 인색했다. 그 대신 하드밥에 프리 재즈적인 자유로운 요소가 가미된 포스트밥으로 60년대 재즈씬을 이끌기도 했다. 그 사이에는 재즈와 클래식의 요소를 접목한 서드스트림이라는 장르를 선보이기도 했다.



70년대 퓨전 시대를 열다


60년대까지 재즈의 중심축으로 활약한 그는 늘 아쉬움을 느꼈다. 50년대 모던재즈까지는 사람들이 공감을 했지만, 60년대부터는 그렇지 않았던 것. 무엇보다도 록, 소울, 훵크, 포크 등의 대중음악 장르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재즈는 빠르게 사장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장르 음악들을 괘씸하게 여기며 배척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소울, 록, 훵크 등의 장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음악이 자신이 추구해온 것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융합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집중했던 그는 전자음에 매료되었다. 마침 그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허비 행콕은 전자음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차였다. 결국 둘이 연구를 하던 끝에 전자음악을 재즈에 접목하기로 결심했다. 허비 행콕은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했다. 신예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을 불러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발표한 [Miles In The Sky](1968)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온 마일스 데이비스의 새로운 일탈을 세상에 공표한 작품이었다. 너무 새로운 음악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늘 그랬듯 곧 수긍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지미 헨드릭스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의 공연을 본 마일스 데이비스는 전자적인 소리에 록과 훵크적인 요소를 더 가미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바로 [Bitches Brew]다. 이 시기에 마일스 데이비스는 창작욕이 폭발하고 있었다. 음악은 난해했지만, 재즈가 어떠한 방향으로 새롭게 설정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었다. 본 앨범에 참여한 조 자비눌, 웨인 쇼터, 칙 코리아 등의 연주자들은 자신만의 퓨전 재즈 밴드를 꾸리며 퓨전 재즈의 붐을 일으켰다. 이들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과는 달리 직관적이고 공감하기 쉬운 사운드를 구축했다. 이전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했던 허비 행콕 역시 헤드헌터스라는 훵크 재즈 밴드를 꾸려 대성공을 이루게 된다.




은퇴와 암흑기


1975년, 마일스 데이비스는 은퇴를 선언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전담 편곡가/작곡가로 활약한 길 에반스는 “마일스는 이제 지쳤다. 휴식이 필요한 때”라고 전했다. 확실히 마일스 데이비스는 진화를 위해 자신을 혹사했다. 그 마지막 결과물인 70년대의 작품들은 신선함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늘 선두주자로 앞길을 밝혀왔던 그가 더 이상 나아갈 길을 보지 못해 좌절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어찌 감추고 살까. 그는 1979년에 복귀를 선언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은퇴기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더한 영화 [마일스]가 개봉하기도 했다.) 복귀한 뒤에는 다시 은퇴 직전까지 했던 재즈록 퓨전을 다시 선보였다. 역시 그리 새로울 건 없었다. 그러던 중 1985년에 발표한 [You're Under Arrest]는 퓨전이었지만 달랐다. 이전과는 달리 가볍고 쉬운 음악이었던 것. 마이클 잭슨의 ‘Human Nautre’, 신디 로퍼의 ‘Time After Time’이 실렸다. 일부는 이것을 두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완벽한 퇴보로 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약 10년 동안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스무드 재즈의 영역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주는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년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했다는 점엔 조금 더 후한 점수를 주어도 되지 않을까.




힙합과의 만남 두밥


그렇게 마일스 데이비스는 팝, 록, 훵크 등을 접목하며 음악을 완성해나갔다. 그 시기에 마커스 밀러라는 천재 베이시스트/프로듀서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곡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연주도 탁월했으니까. 두께감 있게 연주하는 베이스에 강력한 슬랩 주법까지, 마커스 밀러의 선 굵은 베이스 사운드는 힘이 빠져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의 허리를 곧게 펴주었다.


하지만 세 장의 앨범을 함께한 뒤 마커스 밀러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도 다시 변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새로움을 갈구했다. 창문을 열자 뉴욕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온갖 잡음, 사람들의 대화 소리 등등, 인위적인 소리와 그렇지 않은 것들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그가 데뷔했던 4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그는 재즈의 중심축이었다. 재즈의 황금기를 경험하기도 했고, 재즈가 음악계 피라미드 최하단까지 몰락하는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도 그는 재즈와 대중음악을 오가며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그도 재즈가 더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까지 갔다는 걸 알았다.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욕이었지만,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건 랩이었다. 잠시 고민을 했던 그는 당시 최고의 힙합 레이블이었던 데프잼의 대표 러셀 리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러셀 시몬스는 당시 젊은 힙합 프로듀서였던 이지 모 비(Easy Mo Bee)를 소개시켜줬다. 이지 모 비는 우탱 클랜(Wu-Tang Clan), 투팍(2Pac),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 엘엘 쿨 제이(LL Cool J) 등의 스타들과 작업하는 90년대 힙합 프로듀서였다. 이지 모 비에게 그는 자신의 음악이 이제는 힙합/알앤비 라디오에서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지 모 비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다시 새로운 걸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60대의 나이든 아저씨가 ‘같이 힙합 좀 해보자’고 접근하는데 어떤 20대 청년이 선뜻 나서겠는가. 새파랗게 어린 친구였지만,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갖춘 음악가에는 늘 열린 자세로 도움을 청했다. 아무리 음악 영웅이라고 할지라도 한물간 재즈 연주자였던 마일스 데이비스를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그의 이러한 열린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둘은 40살의 간극을 어떻게 메웠을까? 간단했다. 이지 모 비가 곡을 들려주고, 마일스가 마음에 들어 하면 그대로 트럼펫을 들고 그 위에 멜로디를 연주했다. 확실히 그의 연주에는 강렬한 힘과 긴 호흡이 없었다. 오히려 짧은 소리 파편들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까울 것이다. 문제 될 것 없었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의 소리로 음악을 가득 채운다기보다는 곡을 완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참여했다.


이지 모 비는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초콜릿 밀크(Chocolate Milk), 제임스 브라운 등의 훵크 뮤지션뿐 아니라 도널드 버드, 진 에먼스의 재즈 연주를 샘플링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힙합에 접근했다.


여섯 곡이 완성되었을 무렵, 마일스 데이비스는 쓰러지고 만다.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1991년 9월 28일, 마일스 데이비스는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지 모 비는 발매 레이블인 워너에 찾아가서 마일스 데이비스의 ‘러버밴드 세션’ 테이프를 내달라고 말했다. 이 테이프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콜롬비아에서 워너로 옮겨갈 때 발표하지 못한 채로 남긴 연주 테이프였다. 그는 이 곡들이 수록되면 마일스 데이비스도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실린 트랙이 ‘High Speed Chase’ ‘Fantasy’ ‘Mystery’다. 물론, 이지 모 비가 손을 본 트랙이다. 이 앨범은 [Doo-Bop]이라는 제목으로 1992년에 발표됐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자 사후 앨범이 되었다.


[Doo-Bop]은 당시 평론가들에게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통적인 재즈 녹음 방식에서 이탈했고, 밴드리더가 파편적으로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곡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톤과 연주의 느낌이 너무 다르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기량이 떨어진 말년이라는 점, 그리고 녹음 방식, 이전 녹음물을 활용한 추가 수록곡 등을 떠올린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의미도 지닌 앨범이다. 이 앨범이 발표되자 많은 연주자들이 재즈와 힙합을 접목한 앨범을 쏟아냈다. 이듬해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거의 붐이라도 봐도 좋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예전 같지 않은 말년의 아티스트라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한 것을 따라가면 음악계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힘겨운 80년대를 보냈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류희성 | 월간 재즈피플 기자

여러 매체에서 음악과 관련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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