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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바비 허처슨을 추모하며  
제목 [기획] 바비 허처슨을 추모하며   2016-10-10


블루노트가 흠모한 아방가르드 길라잡이

바비 허처슨을 추모하며


음악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돈 때문에 재즈를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음악, 특히 재즈와 돈을 연결 짓지 않는 것은 내가 고지식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재즈의 메카 뉴욕을 떠나 고향 캘리포니아 시골을 선택한 일이 땅 부자가 되는 탁월한 결정이라는 바비 허처슨의 자랑에 박수치기 주저할 만큼 고지식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에서 20마일 남쪽, 인구 3천 명이 안 되는 조용한 휴양지인 몬태나(Montana). 바비 허처슨이 4천만 원에 산 이곳이 지금은 어지간한 부자도 쉽게 넘보지 못할 동네가 됐다. 바비 허처슨이 데뷔할 때만 해도 자신은 물론 주변의 그 누구도 그가 가난뱅이 연습생 신세를 쉽게 벗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데뷔 무대는 망했다. 실력이 없어서 비브라폰 건반 위에 연주할 음들을 표시해놓았는데 무대 매니저가 닦아버린 것이다. 밀트 잭슨의 앨범을 우연히 들은 뒤부터 벽돌공인 아버지를 도와 가며 모은 돈으로 비브라폰을 샀다는 이야기는 한참 후에나 전설이 된 것이었다.




비브라폰의 거목, 바비 허처슨


2014년 11월 9일. 나는 뉴욕 링컨센터 디지스 재즈클럽에서 바비 허처슨을 기다렸다. 73세 노장의 허처슨을 위해 링컨 센터와 후배 연주자들이 여러 날에 걸쳐 마련한 뜻깊은 콘서트였다. 평생을 두고 허처슨을 찬미했던 뉴욕이 그의 말년에도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허처슨은 참석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폐기종을 앓고 있는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여섯 시간이나 걸려 날아오기에는 뉴욕은 이제 참으로 먼 곳이 되고 말았다. 사흘에 걸친 그의 트리뷰트 콘서트 중 마지막 날, 피아니스트 아론 골드버그 그룹의 공연을 들었다. 비브라폰은 조셉 더블데이가 연주했다. 신인 주자였지만 젊은 날의 바비 허처슨을 보듯 활력 있고 빠르고 과감한 속도로 바비 허처슨의 곡들을 연주했다. 바비 허처슨은 모든 공연을 웹캐스트 라이브로 지켜봤다. 나는 디지스 클럽에서 허처슨을 직접 못한 아쉬움을 바로 이곳 디지스 클럽에서 2009년 가진 허처슨 트리오 라이브 실황 앨범을 상기함으로써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이 공연을 끝으로 바비 허처슨은 실질적으로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몬태나 집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요양에 들어갔다.


디지스 클럽 공연은 오르간 마스터 조이 드프란체스코와 드러머 랜드햄과 함께 했고 기타리스트 피터 번스타인이 게스트로 참여했다. 허처슨의 강렬함은 그대로였다. 드프란체스코의 깊고 뭉텅하며 블루지한 B3 오르간 사운드는 얼음처럼 차갑고 세심한 허처슨의 강렬한 사운드와 조화를 이루며 매우 독특한 텍스쳐를 이루었다. 특히 듀크 엘링턴의 ‘Take The Coltrane’에서의 감동은 컸다. 말렛(Mallet, 비브라폰 채)의 속도는 전성기만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민첩하고 자극적이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뉴욕의 재즈팬들이 열정적으로 허처슨을 흠모했던 이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영롱하고 몽환적인 비브라폰에 프리즘처럼 다채로운 색채를 더하는 그의 연주는 거칠고 과감하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어쩔 땐 유리처럼 투명하고 날카롭기까지...


이 쿨한 감동은 예민한 귀를 가진 감성적인 청중의 마음을 꿰뚫어 송곳처럼 파고들기 마련이었다. 어번 스타일의 세련된 톤, 모던하고 섬세한 그 톤에 열정적인 팬이 된 대표적인 뉴요커는 블루노트 레코드의 수장인 알프레드 라이언(Alfred Lion)이었다. 허처슨이 뉴욕 생활을 한 것은 불과 1960년에서 1967년까지 7년에 불과했다. 이 기간에 허처슨은 알프레드 라이언이라는 막강한 서포터를 얻었다. 바비 허처슨이 블루노트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재키 맥린 때문이었다. 1960년 허처슨이 빌리 미첼과 함께 뉴욕 버드랜드에 찬조 출연했을 때만 해도 무명 연주자나 다름없었다. 버드랜드의 호스트는 라이오넬 햄튼과 밀트 잭슨이 있으니 넌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허처슨은 호스트에게 팁을 5달러이나 준 뒤에야 자기 이름을 무대에서 제대로 소개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블루노트와 뉴욕, 몬태나를 지키다


허처슨은 뉴욕에서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꾸리며 기회를 노렸다. 아트 파머, 베니 골슨과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래찬 몽커 3세를 통해 재키 맥린을 소개받았다. 재키는 말렛을 네 개 사용하는 걸 좋아했고 신인인 허처슨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재키 맥린이 알프레드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어 새 밴드의 연주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스턴에서 온 열일곱 드럼 천재 토니 윌리엄스도 합류한 상태였다. 재키 맥린의 걸작 [One Step Beyond] (Blue Note/1963)은 이렇게 탄생했다. 재키 맥린 앨범 이후 허처슨은 알프레드 라이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몽커 3세, 앤드류 힐, 그랜트 그린, 에릭 돌피 등과도 녹음했다. 바비 허처슨처럼 LA에서 뉴욕으로 온 에릭 돌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허처슨의 누이 페리와 연인이기도 했던 돌피는 허처슨이 뉴욕에서 재키 맥린과 그룹을 만들었다는 걸 알고 허처슨을 찾아왔다. 에릭 돌피의 유일한 블루노트 앨범이자 돌피의 역대 걸작 [Out To Lunch]는 허처슨과의 의기투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프레디 허버드, 리처드 데이비스, 토니 윌리엄스, 그리고 바비 허처슨. [Out To Lunch]에 허처슨의 존재감은 막강했다. 델로니어스 몽크를 트리뷰트한 곡 ‘Hat And Beard’에서 허처슨은 비브라폰 사운드의 쓰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듣게 했다. 쇳소리를 내듯 거칠게 내려찍는 스카타토는 무슨 사건이 벌어질 듯 비밀스럽고 불안정한 세계로 안내하는 것만 같다. 허처슨이 없었더라면 [Out To Lunch]라는 오묘한 스토리가 드라마틱하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둡고 기괴한 사운드지만  안정적인 하모니 틀 안에서 아방가르드 하드밥을 유려하게 선사한다.


늘 새로운 사운드를 찾던 알프레드 라이언에게 그 곡예의 비밀을 다루는 허처슨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다른 악기들이 허처슨의 투명한 사운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운드는 프리즘처럼 굴절되고 풍부해지고 분산되며 재배치된다. 어렵게 들리는 그 어떤 것들도 그 재배치와 순화의 느낌으로 인해 좀 더 안정적인 어떤 것처럼 들리게 된다. 그래서 ‘난해한 음악도 쉽게 들리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는 허처슨의 말이 수긍이 간다. 그는 조 샘플의 영향을 받아 인터벌을 두고 여러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운드는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방향의 신호를 주며 이질적인 것을 친근하게 이끄는 힘이 있다.


알프레드 라이언은 허처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녹음할 수 있게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허처슨의 뉴욕 생활은 갑자기 1967년에 끝났다. 어느 날 조 체임버스와 연습 휴식 중에 센트럴파크에서 대마초를 피다 경찰에 잡혔기 때문이다. 다른 연주자들이 찾아가 보석금을 낸 뒤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허처슨은 카바레 카드(공연 허가증)와 택시 운전 면허증을 잃었다. 허처슨은 남가주로 돌아가서 하드밥 테너 색소포니스트 해롤드 랜드와 함께 [The Peace-Make]를 발표했다. 1967년 카데사에서 발매됐지만 알프레드 라이언의 간청으로 이후 해롤드 랜드와의 작업은 블루노트를 통해 발매된다. [Total Eclipse]부터 1975년 [Inner Glow]까지 해롤드 랜드와 여덟 장의 앨범을 블루노트에서 발표한다. 그중 칙 코리아가 참여한  [Total Eclipse]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허처슨의 황금 같은 ‘블루노트 시기’는 1963년 데뷔앨범 [The Kicker]를 시작으로 1977년 [Knucklebean]까지 14년간 스물두 개 리더작, 세션을 포함하면 40여 개의 앨범에 달하니 바비 허처슨은 최장기간 블루노트와 계약한 연주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37년이 흐른 뒤인 2014년, 앞서 말한 조이 드프란체스코와 빌리 하트(드럼), 데이빗 샌본(색소폰)이 참여한 [Enjoy The View]가 블루노트에서 발매됐다. 그러나 이 앨범이 허처슨의 마지막 스튜디오 레코딩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블루노트야말로 허처슨의 음악 인생 처음과 끝을 같이한 영원한 동반자가 아니었나 싶다.


허처슨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지난 8월 15일 75세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아름다운 고향 몬태나에서 지내던 그가 떠났다. 그렇지만 땅이 남았다. 음악도 남았다. 허처슨에게 주어진 훈장처럼 말이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깨끗하게 살다간 멋진 인생이었다.  




양수연 | 재즈 칼럼니스트

1997년 국내 최초의 유로 재즈 월간지 [재즈 힙스터]를 발행했다.

재즈와 요리를 사랑하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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