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Article

재즈피플에서 소개하는 주요 기사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기획] 재즈를 가장 재즈답게 담아낸 레이블  
제목 [기획] 재즈를 가장 재즈답게 담아낸 레이블   2019-01-11

김광현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2019년은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 창립 80주년이 되는 해다. 음악을 음반보다 음원과 스트리밍으로 듣는 21세기에 재즈 레이블이 음악팬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의문이지만 블루노트는 재즈와 동의어로 쓰이는 매우 중요한 레이블이다. 그래서 재즈를 막 듣기 시작하는 초심자나 마니아 모두에게 추천하는 레이블이다. 20여 년 전부터 진행된 음반사의 인수합병으로 레이블의 오리지널리티가 희미해진 지 오래지만 다른 장르보다 재즈 레이블은 그 틈새에서 고유의 가치를 최대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모던 재즈의 보고(寶庫)인 블루노트는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하며 재즈의 주요 레이블로 시대를 이끌고 주요작을 선보이고 있다.


5년 전 2014년은 블루노트가 EMI 뮤직에서 유니버설 뮤직 그룹으로 합병된 후 앨범 발매가 이루어진 첫해였다. 이미 블루노트는 1980년대부터 5년 주기로 다양한 편집 앨범, 리마스터반 재발매, RVG 에디션 등을 선보여 왔는데 80주년에는 어떤 기획들을 준비할지 궁금해진다. 재즈를 처음 듣는 사람들에는 다소 진지하고 무거울 수 있는 블루노트 음악이지만 어떤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 고전을 빼놓을 수 없듯 재즈 팬들에게 블루노트는 반드시 들어야 하고 반드시 소장해야 하는 재즈의 고전이다.



새로운 역사, 블루노트의 시작


블루노트는 알프레드 라이언(Alfred Lion, 1908~1987)으로 시작된다. 독일 베를린 출신 유대인으로 미술과 건축 관련된 일을 하던 부친의 뒤를 이으려 했던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면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1938년 겨울, 12월 23일 뉴욕 맨해튼 카네기 홀에서 존 해먼드가 기획한 ‘영가에서 스윙까지’(From Spiritual To Swing)라는 전례 없는 콘서트를 목도한다. 카운트 베이시, 헬렌 흄즈, 조 터너 등 스윙 시대 거장들을 한자리에 모은 행사로 독일에서 건너온 청년에게 또 한 번의 문화적 충격을 준다. 열혈 재즈 팬이었던 알프레드 라이언은 이제 단순히 관객이기를 거부하고 공연에서 ‘Jumping Blues’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미드 럭스 루이스와 앨버트 애먼스에게 음반 제작을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킨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2주 후인 1939년 1월 6일 금요일 오후, 소년 알프레드 라이언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부기우기(Boogie Woogie, 초기 재즈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가 연주되었고, 이 녹음은 블루노트의 위대한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가 됐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이 둘의 피아노 연주는 인기를 얻어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녹음은 프랭키 뉴튼, 테디 번, 앨버트 애먼스 등이 참여한 ‘포트 오브 할렘 재즈멘’(Port Of Harlem Jazzman) 세션으로 1939년 4월 7일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달 후에는 [Port Of Harlem Seven]이란 앨범을 녹음하는데 이때 시드니 베세의 명연이자 블루노트 레이블이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명연 ‘Summertime’이 탄생한다. 이때 알프레드 라이언은 조력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블루노트 레이블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 프랜시스 울프(Francis Wolff, 1907~1971)와 의기투합한다. 알프레드 라이언과는 베를린 시절부터 재즈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죽마고우로 첫 녹음이 있던 1938년부터 유명을 달리하는 1971년까지 사진, 디자인, 그리고 프로듀서로 블루노트의 한 축을 담당한다.



모던 재즈의 증언자,

그리고 블루노트 콜렉션


블루노트는 부기우기 녹음을 시작으로 1940년대엔 비밥의 한복판에서 전설들을 기록해 나갔다. 1950년대에는 비밥이 화음을 단순화하고 그루브를 가미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것을 감지하고 발을 맞추었다. 섭외, 녹음, 디자인, 홍보 등 모든 면에서 다른 레이블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모던 재즈의 정수 하드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 블루노트는 재즈의 증언자답게 하드밥의 걸작들 쏟아냈다. 가장 상징적인 녹음은 1954년 2월 21일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서 루 도널드슨(알토 색소폰), 클리포드 브라운(트럼펫), 호레이스 실버(피아노), 컬리 러셀(베이스), 아트 블래키(드럼)가 가진 라이브로, 이 밴드는 이후 ‘재즈 사관학교’라 불리는 재즈 메신저스로 이어진다. 특히 당시 버드랜드에서 사회를 맡았던 피 위 마켓의 카랑카랑한 오프닝 멘트는 그 어떤 악기 연주보다 진한 그루브를 담고 있기도 하다. 피 위 마켓의 멘트는 40년 후 애시드 재즈의 열풍을 몰고 오는 어스쓰리의 ‘Cantaloop (Flip Fantasia)’에 샘플링되기도 한다.


호레이스 실버


비록 당시 블루노트 음반들의 상업적 가치는 미비한 수준이었지만 레이블의 설립자 알프레드 라이언은 낙담하지 않고 재능 있는 연주자를 발굴하고 레이블의 음악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블루노트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 신예 행크 모블리, 리 모건, 도널드 버드, 소니 클락, 케니 버렐, 폴 챔버스 등이 블루노트에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다. 1957년 블루노트는 사무실을 웨스트 63번가 47번지로 옮기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그곳에는 밥 와인스톡(Bob Weinstock, 1928~2006)이 운영하는 재즈 레이블 프레스티지(Prestige Records)가 있었는데, 그 덕에 두 레이블 사이에 연주자들의 교류가 잦아 스타일이 유사한 앨범이 동시에 출반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블루노트와 프레스티지 간 선의의 경쟁은 1950년대 후반, 본격적인 스테레오 시대를 맞아 선명한 재즈 사운드로 만개한다. 재즈 팬들에게는 이후 10년간이 가장 소중한 시기이기도 하다.


재즈 마니아들은 블루노트에서 나온 앨범(연주)을 좋아하고, 그 음반을 수집한다. 1990년대 이후 리마스터 재발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앞서 말한 대로 2014년부터는 블루노트 로고와 유니버설뮤직 로고가 나란히 찍힌 앨범이 출시되고 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블루노트 앨범은 사랑받고 있는데 수집할 때는 일련번호(BLP)를 보고 수집하는 것이 정공법이다. 명반들이 집중된 1500시리즈와 4000시리즈가 주요 수집대상이다. 1500시리즈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Volume 1](1501번)을 시작으로 총 99장(1553번은 없음)이고, 4000시리즈는 소니 롤린스의 [Newk's Time](4001번)을 시작으로 총 100장이 있다. 재즈 팬이라면, 그리고 블루노트 팬이라면 199개의 타이틀을 모으는 것이 제1차 관문일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스테레오 앨범에는 일련번호 앞에 ‘8’자를 더한 BST 넘버로 표기되어 있다.  



블루노트의 위기, 그리고 재도약


사노바의 유행과 로큰롤의 공세에 좌초해 있던 1960년대 재즈계에 블루노트는 소울 재즈를 선보였다. 호레이스 실버의 [Song For My Father]와 리 모건의 [The Sidewinder] 같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앨범이 1963년에 발표됐다. 해먼드 B3 오르간 하나로 소울 재즈의 대표선수가 되는 지미 스미스의 출렁이는 그루브는 1960년대 재즈사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젊은 청중들은 밥 딜런, 비틀스, 지미 헨드릭스 음악에 빠져 재즈를 잊은 지 오래였고, 거기에 버드(찰리 파커, 1955년 사망) 이후 재즈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는 존 콜트레인의 이른 사망(42세, 1967년)으로 재즈는 중심축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게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일렉트릭 퓨전 재즈로 재빠르게 선회했고, 모던 재즈의 매너리즘을 타계하고자 했던 에릭 돌피, 오넷 콜맨, 세실 테일러, 앨버트 아일러, 앤드류 힐 등은 치열한 프리 재즈 도모했다. 이렇듯 1960년대 재즈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마냥 모든 곳에서 일촉즉발의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앤드류 힐


블루노트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담아냈고, 열린 자세로 재즈의 조 헨더슨, 도널드 버드,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칙 코리아의 성공적인 데뷔 또한 주선했다. 그러나 1964년 영국 청년 4명(비틀스)의 미국 침공 이후 재즈계는 전반적으로 움츠러들었고 블루노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눈에 띄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65년에 리버티 레코드에 블루노트가 매각됐다. 은퇴를 결심했던 알프레드 라이언은 1967년에 사임하고 만다. 알프레드 라이언을 중심으로 블루노트 사단이 간직해온 탁월한 혜안과 재즈(레이블)의 위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난관을 헤치며 프랜시스 울프가 블루노트에 남아 이끌어갔지만 1971년에 세상을 떠나 블루노트의 화려한 전성기가 일단락되고 만다.


새롭게 블루노트를 맡은 조지 버틀러(George Butler, 1931~2008)는 그동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시대 흐름에 맞게 퓨전 색을 더했다. 도널드 버드와 바비 험프리의 앨범을 제작한 래리 미젤과 폰스 미젤 형제, 그리고 얼 클루와 노엘 포인터의 앨범을 제작한 데이브 그루신과 래리 로젠 같은 프로듀서와 함께했다. 그러나 음반업계의 불황은 이런 블루노트의 대중적 노선마저 집어삼켰고, 1981년에 블루노트는 제작 중단에 들어가게 된다.


1983년에는 EMI 뮤직의 회장 바스카 메논이 블루노트를 인수하며 블루노트의 주인은 다시 한번 바뀌게 된다. 주인이 계속 바뀌면서 블루노트는 예전의 영광스러운 빛을 잃었는데, EMI 뮤직은 블루노트의 대표 자리에 브루스 룬드발(Bruce Lundvall)을 임명하면서 재도약을 준비했다. 그는 10대 때부터 블루노트 78rpm(분당 회전수) 음반을 모으던 열혈 블루노트 마니아로, 1957년 대학 졸업 후 블루노트에 입사하려고 알프레드 라이언과 인터뷰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 꿈을 1984년에 이루게 된 것. 당시 브루스 룬드발은 엘릭트라 레코드 사장으로 이미 음반업계에 알려진 실력자이기도 했다. 브루스 룬드발은 프로듀서 마이클 커스쿠나,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와 함께 블루노트 고전을 재발매했고, 미발표 녹음을 창고에서 찾아 세상에 소개하며 다시 한번 재즈 팬들에게 블루노트가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게 열정을 다했다.


지금 블루노트 로고에 사용되고 있는 ‘The Finest In Jazz’라는 새로운 슬로건과 함께 진행된 이들의 첫 프로젝트는 ‘One Night With Blue Note’라는 기념 공연이다. 1985년 2월 22일, 뉴욕의 타운 홀에서 블루노트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아트 블래키, 지미 스미스, 조 헨더슨, 맥코이 타이너, 허비 행콕, 프레디 허버드 등)을 한데 모은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이 뜻깊은 자리에는 그동안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알프레드 라이언과 그의 아내 루스 라이언, 루디 반 겔더, 리드 마일스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공연은 저녁 8시에 시작해 새벽 4시까지 이어졌는데, 아침 식사 후 잼 세션이 다시 이어져 거의 정오가 되어 끝났다고 한다.


프레디 허버드


워낙 많은 연주자가 초대되고 귀빈도 많아 여러 일이 있었는데 마이클 커스쿠나에 의하면 아트 블래키가 실수로 같은 날 런던 공연을 잡아 그의 참석이 무산될 뻔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런던 측에 양해를 얻어 콩코드 비행기로 모시고 와 겨우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은 블루노트 설립 65주년을 축하하며 2003년에 DVD로 발매되어 블루노트의 찬란한 영광을 재즈 팬들에게 다시 한번 보여 주기도 했다. 이 공연은 노년의 창업자가 다시금 세상에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는 한편, 1980년대 재즈가 재조명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년 후 1987년 2월 2일 알프레드 라이언은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재즈의 본질을 지키며

다양한 스타일 추구하다


브루스 룬드발은 블루노트가 과거 모던 재즈만을 답습하는 레이블이 아닌 전통을 계승/발전하면서 오늘의 음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1980년대 중반 재설립의 기치를 내걸고 나아갈 때 피아니스트 미셀 페트루치아니, 양손 태핑 기타 연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스탠리 조던, 그리고 신기에 가까운 보컬을 선보인 바비 맥퍼린이 등장해 블루노트의 새로운 모습을 대변하는 아티스트로 사랑을 받게 된다. 세 명의 아티스트는 블루노트가 지켜온 전통에서 조금씩 벗어난 연주자로 미셀 페트루치아니는 블루노트와 정식 계약한 첫 번째 프랑스인 연주자다. 스탠리 조던은 양 손가락으로 기타 지판을 종횡무진 오가며 퓨전 색 짙은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들려줬다.


1990년대가 되면서 블루노트는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지만, 미처 이를 드러내지 못한 음악가들을 발굴했다. 특히 이미 다른 레이블에서 좋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중견 아티스트를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존 스코필드(기타), 카산드라 윌슨(보컬), 테렌스 블랜차드(트럼펫)는 자신의 많은 앨범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을 블루노트에서 발표하게 된다. 또한 브라질 출신의 엘리아느 엘리아스(피아노/ 보컬), 큰 스케일의 연주자 조 로바노(색소폰), 쿠바 출신 곤잘로 루발카바(피아노), 그리고 재키 테라슨(피아노) 등 지금도 재즈 팬들에게 사랑받는 연주자들의 음악을 블루노트에 기록했다.


1990년대 초, 영국 런던의 클럽 씬은 1960년대 블루노트에서 녹음된 소울 재즈를 댄스 음악으로 탈바꿈시키는데 그랜트 그린, 루 도널드슨, 루벤 윌슨 등 블루노트 소속 연주자들의 곡을 샘플링하여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감각적인 DJ들의 활약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어스쓰리(Us3)처럼 힙합과 재즈를 성공적이고 빈틈없이 융합해낸 그룹은 매우 드물다. 이러한 흐름은 메데스키 마틴 앤 우드(MM&W)라는 잼 세션 스타일의 팀으로까지 이어졌다. 1999년 설립 60주년이 되는 해에는 블루노트를 대표하는 명반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리마스터반 재발매(RVG 에디션)가 시작된다. 그동안 CD로 발매되지 않았던 숨겨진 앨범까지 루디 반 겔더 손을 거쳐 나오면서 재즈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재발매의 열기도 시장의 큰 흐름을 이겨 내지는 못하고 새로운 녹음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주요 아티스트들은 블루노트를 떠나게 된다.


이처럼 2000년대 들어 다시 한번 어려운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블루노트를 기적처럼 다시 일으키는 신데렐라가 등장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젊은 싱어송라이터 노라 존스의 데뷔다. 힙합과 알앤비가 주류 팝을 장식하던 당시 노라 존스의 노래는 강렬한 한 방이 없는 소박한 음악이었다. 그녀는 소호의 식당에서 재즈 연주를 하거나 컨트리 밴드와 클럽 무대에 서는 정도의 비주류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노래는 언젠가는 사랑받고 인정받듯 블루노트에 발표한 데뷔작 [Come Away With Me]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그녀의 잔잔한 노래는 2001년 911테러로 인해 상처 입은 미국인을 보듬어 주는 노래가 되어 상당 기간 사랑받게 된다. ‘Don't Know Why’가 실린 이 앨범은 2003년 제45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최우수 신인’ 부문을 포함한 5개 부문을 수상했고, 블루노트 역사상 최고의 판매실적(2,700만 장)과 화려한 수상 기록을 지니게 된다. [Come Away With Me]는 노라 존스 개인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살림살이가 어려웠던 블루노트에 활력을 불어넣어 보다 전통적인 음악가들과 계약을 맺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알 그린, 윌리 넬슨, 애니타 베이커가 대표적이며 제2의 노라 존스를 꿈꾸며 공을 들인 에이머스 리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21세기에도 영원할 블루노트


노라 존스의 메가 히트로 블루노트는 다시 한번 기사회생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재즈가 아닌 컨트리, 포크 성향의 그녀 음악이 블루노트 로고를 달고 나오면서 재즈 팬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열혈 재즈 마니아들은 모던 재즈를 지켜야 할 블루노트가 재즈를 외면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블루노트를 넘어 앞으로 재즈에 닥친 위험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반면 포스트 노라 존스 대열에 편승하고자 많은 음반사가 경쟁적으로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열풍까지 분다.


이처럼 2000년대 들어와 다양한 콘셉트의 앨범을 선보이는 블루노트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카산드라 윌슨, 다이앤 리브스 등 재즈 보컬리스트와 그렉 오스비, 브라이언 블레이드 등 새로운 전통을 기록하는 포스트밥 주자들의 기록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 미국 재즈를 이끌 대가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제이슨 모란의 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고, 재즈와 힙합 두 장르를 내면화하여 하나의 완전체로 구사하는 로버트 글래스퍼의 인기도 상당하다. 설립 70주년을 기념하는 2009년에는 피아니스트 빌 샬랩을 주축으로 중견 연주자들 7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블루노트 세븐(The Blue Note 7)을 결성해 ‘Inner Urge’, ‘Dolphin Dance’ 등 블루노트를 대표하는 명곡을 다시 연주한 [Mosaic]를 발표하며 자축하기도 했다.


웨인 쇼터


현재 블루노트는 2012년부터 대표직을 맡은 돈 워스(Don Was)가 이끌고 있다. 그는 디트로이트 록 밴드 워스 낫 워스(Was (Not Was))의 베이시스트이자 리더로 활동한 바 있는 베테랑이다. 특히 프로듀서 역량이 뛰어나 롤링 스톤스, 밥 딜런, 보니 레이트, 이기 팝 등의 앨범을 진두지휘했다. 돈 워스는 이런 경험을 살려 앰브로스 아킨무시리, 크리스 데이브 같은 신인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5년 전인 2014년 2월, 제5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 상을 받으며 다크호스로 등장한 남성 보컬리스트 그레고리 포터와 블루노트로 돌아온 거장 웨인 쇼터도 빼놓을 수 없는 현재의 블루노트 얼굴이다. 웨인 쇼터는 43년 만에 블루노트로 돌아와 복귀작 [Without A Net]을 2013년에 선보였고 지난해 [Emanon]을 발표해 곧 있을 그래미 유력 수상자로 올라와 있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예상컨대 블루노트는 팔순이 되었다고 갑자기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 꾸준한 신인발굴과 의미 있는 고전을 찾아내 주길 바랄 뿐이다.


“땡스, 블루노트!”  






월간 재즈피플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면 '재즈피플×블루노트' 달력을 드립니다.

 정기구독 신청하기

첨부파일 horace2.JPG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수정 취소

/ byte

댓글 입력

이름 비밀번호 관리자답변보기

확인

/ byte


*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