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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칼라 블레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한 음악 인생  
제목 [기획] 칼라 블레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한 음악 인생   2016-07-08


칼라 블레이 (Carla Bley)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한 음악 인생


요리하는 사람 중에는 유난히 손맛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는 특별히 요리를 배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남다른 조리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먹어보면 감탄할 만큼 맛있는 요리를 한다. 같은 재료, 양념, 소스를 모두 조리법에 따라 같이 사용해도 그의 요리는 남다르다.


아예 이름도 없는 요리를 할 때 그의 손맛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한다. 초대 손님의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 손님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요리를 15분 만에 만드는, TV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의 요리사들처럼 흔히 알고 있던 맛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매력적인 요리, 적당한 이름을 얻고 정식 메뉴로 선보여도 괜찮을 법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칼라 블레이의 음악을 들으면 이런 손맛 좋은 요리사가 생각난다. 머리에 폭탄을 맞은 듯 사방으로 뻗친 독특한 머리를 한 이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는 프리 재즈, 록, 교회 음악, 클래식 등 여러 스타일의 음악을 버무려 쉽게 따라 하기 힘든 그녀만의 음악으로 만들 줄 안다. 게다가 그 음악은 맛있다. 스타일리스트라 할만하다.




독학으로 음악을 배우다


칼라 블레이가 독창적인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1936년 5월 11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 3세 때부터 5세 무렵까지 교회에서 합창을 지휘하고 피아노를 가르쳤던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다. 이후 그녀는 오로지 독학으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구축했다. 여기서는 음반이나 공연을 통해 다른 사람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녀는 “재즈를 공부할 때 최고의 방법은 음반이나 라이브 연주를 듣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듯 선생님을 찾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최대한 듣고 모든 것을 흡수하려고 하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17세에 뉴욕에 와서 재즈 클럽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도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할 수 있다. 그녀는 버드랜드를 시작으로 베이신스트리트, 재즈갤러리, 파이브스팟 등의 클럽에서 담배 파는 일을 하면서 하드밥부터 프리 재즈에 이르는 등 유명 연주자들의 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교와 정서적인 측면, 그리고 밴드가 만들어 내는 사운드 등을 흡수했다.




작곡가 칼라 블레이와 첫 남편 폴 블레이


클럽의 담배 아가씨로 일하며 유명 연주자들의 공연을 보고 배우면서 칼라 블레이는 꾸준히 곡을 썼다. 그리고 대범하게도 유명 연주자들에게 악보를 건네곤 했다. 자신의 곡을 연주해 달라면서 말이다. 대부분의 연주자는 이런 그녀의 부탁에 난처해했다. 하지만 폴 블레이만은 달랐다. 1932년 생으로 당시 찰스 밍거스 밴드에서 연주하며 두 장의 리더 앨범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 캐나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는 그녀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나아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1957년 결혼했다.


이후 폴 블레이는 [Solemn Meditation](GNP Crescendo/1958)을 시작으로 [Footloose! ](Savoy/1963), [Barrage](ESP-Disk/1965), [Closer](ESP-Disk/1966) 등의 앨범에서 아내의 곡을 직접 연주하며 작곡을 지원했다. 이혼 후에도 그는 [Open To Love](ECM/1972), [Jaco](Improvising Artists/1974), [Turning Point](Improvising Artists/1975), [Paul Plays Carla](Steeple Chase/1992) 등 여러 앨범을 통해 그녀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지미 주프리, 조지 러셀, 아트 파머, 돈 엘리스, 게리 버튼, 스티브 쿤, 필 우즈, 토니 윌리암스 등이 칼라 블레이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1961년 지미 주프리가 폴 블레이, 스티브 스왈로우와 함께 트리오를 이루어 버브 레이블에서 녹음한 두 장의 앨범 [Fusion]과 [Thesis]-1992년 합본되어 ECM에서 [Jimmy Giuffre 3]로 재발매 되었다-, 트럼펫 연주자 아트 파머가 스티브 쿤, 스티브 스왈로우, 페트 라로카 등과 함께한 앨범 [Sing Me Softly Of The Blues](1965)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편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은 아예 칼라 블레이에게 작곡과 편곡을 맡겨 앨범 [A Genuine Tong Funeral](1968)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 앨범은 구성이나 사운드의 질감에 있어 이후 펼쳐질 칼라 블레이의 음악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찰리 헤이든도 그녀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이 베이스 연주자는 1969년 리버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LMO)를 결성하고 첫 앨범 [Liberation Music Orchestra]을 녹음하면서 칼라 블레이에게 편곡을 의뢰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영감을 얻어 전쟁, 혁명 등을 주제로 한 이 앨범의 주제에 맞게 칼라 블레이는 민속 음악과 아방가르드 재즈가 어우러진 빅밴드 음악을 완성했다. 이를 계기로 칼라 블레이는 개인 활동과 별개로 [Ballad Of The Fallen](1983), [Dream Keeper](1990), [Not In Our Name](2005) 등 간헐적으로 발매된 LMO의 앨범에 편곡과 건반 연주로 꾸준히 참여했다.  




JCOA 그리고 마이클 맨틀러


여러 연주자가 칼라 블레이의 곡에 관심을 갖고 연주했지만 그녀의 이름으로 앨범을 녹음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964년 그녀는 뉴욕의 진보적인 재즈 연주자들의 모임인 ‘재즈 컴포저스 길드’에 참여했다. 빌 딕슨을 주축으로 결성된 이 비영리 단체에서 그녀는 트럼펫 연주자 마이클 맨틀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음악적으로 서로에게 끌려 진보적인 성향의 음악을 추구하는 재즈 컴포저스 오케스트라(JCOA)를 결성했다. 이와 함께 두 사람의 개인적 친밀도도 높아졌다. 그 결과 칼라 블레이는 폴 블레이를 떠나 마이클 맨틀러와 함께 살며 1966년, (모친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개성 강한 음악을 하게 되는) 딸 카렌 맨틀러를 낳았다. 그리고 1967년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다.


1968년 JCOA의 첫 앨범 [Jazz Composers Orchestra]을 발매한 후 마이클 맨틀러는 폴 헤인즈의 가사를 바탕으로 재즈 오페라 앨범 [Escalator Over The Hill]을 제작하기로 하고 아내에게 음악을 맡겼다. 이후 1971년까지 3년에 걸쳐 칼라 블레이는 악보로 159페이지-파트 별 악보는 707페이지-에 이르는 대곡을 썼다. 쿠르트 바일 스타일의 연극 음악, 프리 재즈, 록, 인도 음악 등 다양한 음악들이 혼용된 웅장하고 역동적인 빅밴드 음악이었다.


그리고 록 그룹 크림 출신의 잭 부르스, 칼라 블레이, 아직 신인이었던 린다 론스타드, 잔 리, 쉐일라 조던 등의 보컬과 돈 체리, 가토 바비에리, 찰리 헤이든, 존 맥러플린, 엔리코 라바, 로스웰 러드 등 당시 재즈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 있던 진보적인 연주자들이 참여한 JCOA는 그녀의 악보를 훌륭하게 음악으로 구현했다.




와트 레이블


[Escalator Over The Hill]은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과와는 거리가 있었다. 몇몇 스타 연주자를 제외하고 갈수록 대중음악 분야에서 재즈의 비중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앨범을 체계적으로 유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조금이라도 타개하기 위해 1972년 칼라 블레이 부부는 레이블 와트(WATT)를 설립해 앨범을 제작하고 유통해보기로 결심했다. (레이블의 이름에 대해 칼라 블레이는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WATT], LA에 있는 와트 타워, 영어 표현 “Watt the hell was that?”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곤 하는데 실제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레이블의 첫 번째 앨범으로 칼라 블레이는 [Tropic Appetites](1974)를 녹음했다. 셉텟에 두 명의 보컬로 이루어진 미니 오페라의 형식의 앨범이었다. 가사는 역시 폴 헤인즈가 담당했다. 음악 또한 [Escalator Over The Hill]과 마찬가지로 프리 재즈, 동양 음악, 록, 연극 음악 등 여러 음악을 혼용한 것이었다.




독창적인 빅밴드 사운드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갖춘 후 칼라 블레이는 본격적인 앨범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의 주된 관심은 작곡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대편성 연주였다. 그녀는 프리 재즈, 퓨전 재즈, 록, 교회 음악 등을 섞어 단단하고 역동적인, 그리고 유쾌한 빅밴드 사운드를 구현하면서도 솔로 연주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1979년에 발매된 앨범 [Musique Mecanique] 같은 앨범이 좋은 예였다. 텐텟 편성으로 녹음한 이 앨범에서 그녀는 신선하고 유쾌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웅장한 사운드만큼이나 솔로 연주가 돋보이는 음악을 선보였다. 또한 이 앨범부터 보다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대곡 형식의 작곡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없었던 시절 자동으로 연주되는 음악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앨범 타이틀곡을 그녀는 세 개의 파트로 나뉜 대곡 형식으로 작곡했다. 테마-솔로-테마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주제가 발전해 나아가는 서사적인 형식의 작곡이었다.


서사적인 성격 때문이었을까? 1983년 클로드 밀레 감독, 이자벨 아자니, 미셀 세로 주연의 프랑스 영화 [데들리 런](Mortelle Randonnée)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하면서 그녀는 ‘Music Mechanique 1’을 그대로 영화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곡 능력과 빅밴드를 활용하는 편곡 능력은 [Fleur Carnivore](1989)에서부터 만개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이 앨범에서 그녀는 15인조 빅밴드를 이끌고 빅밴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구현했다. 브라스 섹션은 우아하게 움직였으며 그 사이로 각각의 솔로들은 화려한 빛을 냈다. 여기에 밝고 해학적인 분위기는 그녀가 스윙 시대의 빅밴드와는 다른 그녀만의 빅밴드 음악을 만들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것은 15인조 빅밴드 앨범 [The Very Big Carla Bley Band](1991)과 18인조 빅밴드 앨범 [Big Band Theory](1993)로 이어졌다. 언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줄을 모르는, 목적지도 정하지도 않고 나아가는 기차처럼 변화무상한 전진을 거듭하는 곡들로 채워진 이들 앨범에서 밴드는 하나의 몸처럼 탄탄하게 결합되어 움직였다. 마치 키가 2미터를 넘는 장신에 몸무게가 150킬로를 넘는 육중한 몸집에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농구선수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유머 감각까지 훌륭한.


1996년 자신의 음악적 근간의 하나인 교회 음악을 그녀만의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낸 11인조 빅밴드 앨범 [The Carla Bley Big Band Goes To Church]을 발표한 뒤 그녀는 2000년 앨범 [4X4]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시도를 선보였다. 그것은 관악기를 4인조로 최소화한 옥텟 편성으로 빅밴드에 버금가는 울림을 내는 것이었다. 관악기의 규모가 줄어든 만큼 압도적인 느낌 또한 줄었지만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4개의 관악기는 서로 하나가 되었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하며 화려하게 섹션이 교차하는 빅밴드의 느낌을 연출했다.


이후 그녀는 [Looking For America](2003), [Appearing Nightly](2008) 등의 앨범을 통해 자유롭고 현대적인 대형 빅밴드 음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 악기가 교차하는 음악을 만들기에 체력이 달리는 것일까? 2008년 이후 새로운 빅밴드 앨범을 선보이지 않고 있어 아쉽다.




칼라 블레이 스타일의 퓨전 재즈


칼라 블레이의 빅밴드 음악이 특별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규모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종종 브라스 섹션의 총주를 사운드를 풍성하게 만드는 효과는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악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켜 솔로를 펼치는 개별 악기와 어울리게 하곤 했다. 그 결과 그녀의 빅밴드 음악은 대편성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셉텟이나 옥텟처럼 중규모 편성의 연주처럼 들리기도 했다. 중규모 밴드를 이끌며 빅밴드의 역동성과 콤보밴드의 자유로운 솔로 모두를 소화했던 찰스 밍거스의 밴드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콤보밴드 음악 같은 대편성 음악은 [Tropic Appetites] 다음으로 발표한 [Dinner Music](1977)에서부터 드러났다. 노넷 편성으로 녹음한 앨범에서 그녀는 필요에 따라 직접 색소폰을 연주할 정도로 브라스 섹션에 공을 들였지만 그것이 전체를 압도하도록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연주한 오르간, 피아노 그리고 기타 등이 브라스 섹션과 동등한 차원에서 어울리도록 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사운드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었다. 훵키한 리듬을 사용한 것도 이에 한몫했다.  


이것은 1981년에 발매된 [Social Studies]에서도 반복되었다. 뒤뚱거리는 리듬 위로 긴장과 서정이 어우러진 멜로디가 이어지는 3부작 형식의 ‘Reactionary Tango’와 슬픔 어린 발라드 ‘Útviklingssang’(바이킹의 노래) 등 그녀를 대표하게 될 곡들을 담은 이 앨범에서 그녀는 브라스 섹션보다 카를로스 워드, 마이클 맨틀러, 스티브 스왈로우 등의 농밀한 솔로를 강조했다.


1984년에 발매된 [Heavy Heart]은 텐텟 편성이었음에도 더욱 더 콤보밴드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이럼 블록의 기타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Talking Heart’, 스티브 슬레이드의 말랑말랑한 색소폰 솔로가 인상적인 타이틀곡 등은 아예 쿼텟의 느낌마저 주었다.  


1985년에 발매된 [Night-Glo]에서도 그녀는 열 명의 연주자와 함께 하면서도 콤보 같은 사운드를 만들었다. 랜디 브레커, 폴 맥켄들리스 등으로 이루어진 5관 섹션을 배경에 두고 스티브 스왈로우, 칼라 블레이 등의 솔로가 전체를 지배했다. 그리고 훵키한 리듬이 사용된 앨범 타이틀 곡 같은 경우는 [Heavy Heart]에 이어 더욱 더 퓨전 재즈의 질감을 강하게 느끼게 했다.  


 콤보밴드 연주의 질감은 사운드에 매우 은밀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여기에 그녀 또한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현재 칼라 블레이의 곡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Lawns’를 담고 있는 앨범 [Sextet](1987)에서 그녀는 관악기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대신 하이럼 블록의 기타와 스티브 스왈로우의 베이스 기타가 전면에 나서게 했다. 그 결과 평소 농담을 섞은 듯한 느낌 대신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지배하는 퓨전 재즈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스티브 스왈로우와 소편성 연주


1991년 칼라 블레이는 마이클 맨틀러와 이혼했다. 그리고 스티브 스왈로우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보다 3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당시 그녀의 남편이었던 폴 블레이가 20세의 이 베이스 연주자를 밴드에 기용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각자의 활동을 하다가 1978년 앨범 [Musique Mecanique] 녹음에 스티브 스왈로우가 참여하면서 직접적인 음악적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이 이성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1985년 앨범 [Night-Glo]를 녹음할 때는 두 사람이 이미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앨범에서 칼라 블레이가 밴드의 고정 멤버였던 스티브 스왈로우의 이름을 게스트로 명시하며 공동 작업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티브 스왈로우는 2년의 제작 끝에 1987년에 발매된 [Carla]를 통해 칼라 블레이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1986년 칼라 블레이는 와트 레이블 안에 딸 카렌 맨틀러와 스티브 스왈로우의 앨범만을 위한 엑스트라와트(XtraWatt)라는 방계 레이블을 만들었다. 이 또한 그만큼 두 사람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마이클 맨틀러는 1984년에 발매된 앨범 [I Hate To Sing] 이후 칼라 블레이의 앨범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세 사람 사이의 관계 정리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티브 스왈로우와 함께 하면서 칼라 블레이는 소편성 연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 발매된 앨범 [Duets]이 그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Walking Batteriewoman’ ‘Útviklingssang’ ‘Romantic Notion No.3’ ‘Reactionary Tango (In Three Parts)’ 등 칼라 블레이의 곡과 ‘Ladies in Mercedes’ 등 스티브 스왈로우의 곡을 듀오로 연주했다. 빅밴드를 통해 부풀려졌던 모든 것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테마만을 살린 두 사람의 연주는 무척이나 조화로웠다.


이것은 1993년에 발매된 또 다른 듀오 앨범 [Go Together]로 이어졌다. 역시 ‘Ad Inf intum’ ‘Sing Me Softly Of The Blues’ ‘Fleur Carnivore’ 등 대편성으로 연주되었던 칼라 블레이의 곡들을 연주하면서 두 사람은 멜로디와 여백이 지닌 아름다움을 잘 표현했다.


1994년에 발매된 앨범 [Songs With Legs]에서 두 사람은 영국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앤디 셰퍼드를 추가해 트리오 편성의 연주를 선보였다. 색소폰이 추가되긴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듀오 연주와 큰 차이가 없었다.


1998년도 앨범 [Fancy Chamber Music]에서는 아예 마음먹고 실내악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등의 클래식 연주자들을 기용하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어슐라 오픈스를 위해 쓴 ‘Romantic Notion’ 등 재즈 밖의 연주자들을 위해 쓴 곡들을 연주했다. 스티브 스왈로우도 일렉트릭 베이스 기타 대신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해 실내악을 지향하는 사운드에 일조했다.


1999년 다시 듀오로 돌아가 앨범 [Are We There Yet?]을 발표한 후 칼라 블레이는 2004년에 발매된 앨범 [The Lost Chords]를 통해 스티브 스왈로우, 앤디 셰퍼드에 드럼 연주자 빌리 드러몬드가 추가된 쿼텟 편성의 음악을 선보였다. 쿼텟은 ‘Hip Hop’ ‘The Lost Chords 3’ 등의 곡에서 포스트밥의 치열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듀오나 트리오 연주에서 매력을 드러냈던 실내악적인 느낌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보였다. 이것은 쿼텟에 다시 트럼펫을 추가한 2007년도 앨범 [The Lost Chords Find Paolo Fresu]으로 이어졌다. 퀸텟은 쿼텟과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연주를 펼쳤다. 새로이 합류한 이탈리아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 파올로 프레수의 연주는 이전 마이클 맨틀러와는 달랐다. 평소 장점을 보였던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연주는 바나나 퀸텟에서도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차분한 실내악적인 분위기는 크리스마스 앨범 [Carla's Christmas Carols](2009)에서도 지속되었다. 사실 이 앨범은 소편성 앨범은 아니었다. 칼라 블레이, 스티브 스왈로우에 파피리카 브라스 퀸텟이 가세한 셉텟 편성의 앨범이었다. 하지만 브라스 퀸텟은 크리스마스의 경건한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전 칼라 블레이 빅밴드의 브라스 세션과는 달리 차분한 움직임으로 소편성의 실내악적인 느낌을 주었다.


2013년 칼라 블레이는 다시 스티브 스왈로우, 앤디 셰퍼드와 함께 트리오 앨범 [Trios]를 녹음했다. 역시 [Songs With Legs]에서처럼 세 연주자의 우아한 어울림이 돋보이는 앨범이었다. 나아가 와트가 아닌 ECM에서의 첫 녹음이었던 이 앨범은 피아노 연주자로서 칼라 블레이를 새로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앨범들에서 직접 피아노, 오르간 등 건반 악기를 연주했음에도 자신을 피아노 연주자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그녀는 다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지난 달에 발매된 새 앨범 [Andando El Tiempo]에서도 칼라 블레이는 앨범 [Trios]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자신의 80세 생일 즈음해 발매된 이 앨범에서 그녀는 더욱 더 진지한 클래식적인 질감의 사운드를 선보였다. 그리고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주제로 기쁨과 슬픔의 정서가 대비를 이루는 곡의 흐름은 더욱 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나이와 상관없는 신선함과 나이에 걸맞은 완숙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음악이었다. 20년 이상 지속된 트리오의 호흡은 물론 완벽했다.


지금까지 칼라 블레이는 다양한 음악을 재료로 그녀만의 음악을 선보여 왔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꼭 재즈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재즈 연주자들이 연주하기에 적합한 정체불명의 음악 정도로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 물론 그녀가 하드밥, 프리 재즈, 퓨전 재즈의 시대를 살며 이에 관련된 유명 연주자들의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며 자신의 음악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즈에서 그녀가 습득한 것은 어떤 스타일이 아니라 상상하는 법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교회 음악, 프리 재즈, 록, 팝, 클래식 등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거침없는 자신감도 그녀의 음악을 독창적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부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곡을 발표하는 과감함이 그녀의 성공적 음악 인생을 가능하게 했고 발전하게 했다.


올해 그녀는 80세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음악은 어디로 나아갈지 예측 불가하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음악이 신선한 상상력으로 감상자를 새로이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녀의 건강을 기원한다.  




최규용 | 재즈 칼럼니스트

라디오 키스 재즈 담당 PD이다. 저서로는 [재즈], [재즈와 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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