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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원고를 꺼내어] 빌 에반스 트리오  
제목 [10년 전 원고를 꺼내어] 빌 에반스 트리오   2017-11-24


재즈의 근간을 뒤흔든 자유로운 폭풍전야의 긴장감

빌 에반스 트리오


필자가 버클리 음대 재학 중, 실력도 안 되면서 억지로 졸라 한 저명한 교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라즐로 가도니라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버클리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 중에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버클리 재학 중 유일한 F학점이 바로 이 교수의 레슨이다). 라즐로 가도니는 당시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솔로곡들을 트랜스크립하고 있었는데 이런 작업은 사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가와 대가에 의한 철저한 음악적 교감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낳은 21세기 최고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Jean Yves Thibuadet)가 노트 하나하나를 베껴가며 연주하고 녹음한 재즈곡의 피아니스트가 바로 빌 에반스이다.


뉴저지 출신의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적인 재즈라는 장르의 위상을 ‘고귀하신’ 클래식과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빌 에반스는 드뷔시나 라벨 같은 클래식 인상파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절제되고 서정적인 그의 연주는 21세기를 넘어서도 계속될 것만 같다. 이처럼 사후 25년이 지난 작금에도 피아노 재즈 트리오의 확실한 위치를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빌 에반스의 피아노 트리오 역사를 다시 한번 뒤쫓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빌 에반스 트리오가 이토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결정적 이유는 그 자신도 밝혔듯이 화성학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는 풀어져서 재즈가 추구하는 자유로움에 연주자의 감정이입을 강조한 데 있다 하겠다. 따라서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섹션 역시 독자적인 플레이가 가능할 수 있었으며 이는 대위상의 인터플레이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것이다.    




Stage 1

Very Beginning  

With Various Artists


많은 재즈 마니아들이 알고 있듯 빌 에반스는 플루트로 시작해 피아노를 전공으로 대학 교육을 마쳤다.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대학시절 미식 축구팀의 쿼터백으로 그의 모교 사우스 이스턴 루이지애나 대학을 우승으로 이끈 경력이 있기도 하다. 이 청년은 1954년 군 복무 후 뉴욕으로 건너가 명문 매니스 음대의 대학원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 자유사상가이자 리디안 크로매틱 콘셉트의 창시자이며 [Ezz-Thetics](1961)의 주인공 조지 러셀을 만나게 된다. 빌 에반스하면 대개 레니 트리스타노의 후계자라는 언급이 뒤따르지만 그보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했던 빌 에반스의 자유로운 사상은 아마도 이때 확립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그는 첫 리더 데뷔작을 발매하게 된다. 빌 에반스 피아노 트리오 계보의 뿌리가 되는 1956년 작 [New Jazz Conceptions]이다. 찰리 파커가 아꼈던 베이시스트 테디 코틱과 포스트모던 최고의 드러머 폴 모션을 사이드맨으로 수줍은 듯 소품으로 진행된 ‘Waltz For Debby’(빌 에반스 최고의 히트작인 이 전설의 스탠더드곡은 군복무 시절 썼다고 전해진다) 등의 곡으로 27살의 백인 청년이 만들어낸 이 음악은 버드 파웰에 온통 집중되어있던 밥 사운드를 한 순간에 강타해 버렸다. 종종 빌 에반스의 초창기에 대해 언급될 때마다 빌 에반스도 엄청나지만 그를 발굴한 리버사이드 레이블이나 이 앨범의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도 참 대단하다는 부러움을 떨치기 어렵다. 이에 못지않은 심미안을 지닌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다.


빌 에반스라는 이 재능 넘치는 신인은 첫 앨범 발매 후 바로 다음 해 마일즈의 밴드로 투입되었고 [Kind Of Blue]라는 재즈사에 길이 남을 업적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마일즈의 멤버로 참여하여 애쓴지 8개월 만에 리더로서의 트리오 작업으로 귀화한 빌 에반스는 두 번째 트리오 앨범 [Everybody Digs Bill Evans]라는 자신감 넘치는 타이틀로 그만의 음악세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프로덕션 팀의 노파심에 따른 입김으로 폴 체임버스, 필리 조 존스라는 대형 리듬섹션이 일부 섭외했다. 실제로 그는, 1959년 쳇 베이커의 [Chet]에 세션으로 참여한 후 폴 체임버스, 필리 조 존스와 급조한 앨범 [On Green Dolphin Street] 등으로 잠시 외도하기도 했지만 역시 빌 에반스는 음악적 텔레파시를 공유하기엔 비슷한 또래의 백인 연주자가 더 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Stage 2

Golden Trio

With Scott LaFaro, Paul Motian


1959년 12월 증권회사 이사 같은 외모의 앨범 재킷으로 등장한 스튜디오 녹음작 [Portrait In Jazz]부터 빌 에반스 트리오는 젊은 백인 세 명으로 고정 편성되었는데 여전히 드럼엔 폴 모션이 자리하고 있으며, 특히 주목할 점은 본작부터 시작된 스캇 라파로라는 쳇 베이커의 투어 멤버로 활동했던 젊은 베이시스트의 등장이다. 베이스라 하면 저음역대에 머물러있다는 기존 관념을 떨치고 고음역을 강조해나간 그의 음악적 접근법은 빌 에반스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다. 이는 빌 에반스 트리오의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리리시즘에 초점을 맞춘 색다른 콘셉트와 사운드적인 독특함, 여기에 백인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성까지 등에 업은 이들은 즉시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이어 두 달 후 발표한 [Exploration]과 1961년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실황녹음작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Waltz For Debby] 등 네 장의 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며 아직도 꾸준한 판매량을 보일 정도의 재즈사에 길이 남는 최고의 명반을 만들어내게 된다.




스캇 라파로와 폴 모션은 이전의 앨범뿐만 아니라 토니 스캇 악단에서 빌 에반스와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있기에 멤버간의 인터플레이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으며 물 흐르듯 유유히 펼쳐지는 화합력과 솔로 능력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발매된 위의 앨범들은 너무나 많이 소개되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감성적인 발라드곡들이 즐비한 역사적인 앨범들이다.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를 한 장에 묶은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공연 실황의 베스트 앨범 [Bill Evans At The Village Vanguard]을 끝으로 빌 에반스 트리오 1기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베이시스트일 뿐만 아니라 오넷 콜맨, 스탄 게츠의 사이드맨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찰리 헤이든과 당시 신세대 베이시스트 인기 순위 1, 2위를 다투던 스캇 라파로가 25세라는 어린 나이에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사고로 타계한 때문이다.




Stage 3

After Scott LaFaro And Verve Years

With Chuck Israels, Larry Bunker And Others


빌 에반스 역시 동료이자 자신의 오른팔 같았던 존재의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고 한동안 거동도 못 한 채 거의 일 년 동안 칩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그의 영원한 스승 조지 러셀의 격려로 힘을 얻은 빌 에반스는 역시 조지 러셀 섹스텟에서 활동했던 척 이스라엘을 베이시스트로 기용하며 1962년 [Moon Beams]와 [How My Heart Sings]라는 작품을 연속하여 발표하게 된다. ‘Person I Knew’라는 인트로 곡으로 스캇 라파로에게 헌정하는 앨범 [Moon Beams]에서는 리듬파트에 있어 약간의 부조화스러운 면도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새 식구가 들어와서인 것 같고, 반면 나름대로 어떠한 안정된 느낌 역시 자리하고 있는 점은 조지 러셀이라는 그들의 공통분모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사견이다.


[How My Heart Sings]에서는 ‘자, 이제 새 마음 새 뜻으로 나아가보자’라는 듯이 미디엄, 업 템포의 밥 사운드로 과거 빌 에반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색다름을 표출한다. 특히, 척 이스라엘의 연주는 그가 빌 에반스 트리오 참여 전에 몸담았던 세실 테일러와 버드 파웰의 그림자 때문인지 더욱 자연스럽고, 그래서인지 빌 에반스의 플레이도 화합력에 주력하기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밴드를 리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인터플레이가 빌 에반스 트리오의 안정감에 어떠한 손실을 끼쳤다는 의미는 아니며 빌 에반스가 그의 트리오 2기를 출범시키는데 필수조건이었던 단순 사이드맨을 넘어서 그와 어떠한 정신적 교감을 통할 수 있는 뮤지션의 확보에는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위에 소개된 두 앨범 이전에 짐 홀과의 듀엣 앨범 [Undercurrent]라든지, 당시 신예로 주목받던 프레디 허버드의 참여가 이채로운 퀸텟 구성의 [Interplay] 등으로 트리오 구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꾀했다.




그는 1963년 폴 모션 대신 치코 해밀턴의 계승자 래리 벙커를 영입하여 진행된 클럽 라이브 앨범 [At Shelly’s Manne Hole]을 마지막으로 버브로 이적했다. 이곳에서 그는 솔로 앨범 [Conversation With Myself]를 발표한다. 이후 버브의 간판스타 스탄 게츠와 [Stan Getz And Bill Evans], 클라우스 오거만과 뉴욕 필의 협연이 있는 [With The Symphony Orchestra] 등 당시 버브의 메인 프로듀서였던 크리드 테일러에 이끌려 우왕좌왕하기도 했지만 역시 빌 에반스의 백미는 트리오 구성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버브로 이적해서도 빌 에반스는 다양한 멤버와의 트리오 작업을 시도했다. 1963년 12월에 녹음한 게리 피콕, 폴 모션과의 [Trio ‘64], 척 이스라엘-래리 벙커와의 [Trio ‘65] 및 단발성 무명 드러머 아놀드 와이즈와의 [At Town Hall], 1967년 에디 고메즈-필리 조 존스와의 [California Here I Come], 1968년 에디 고메즈, 잭 디조넷과의 제 2회 몽트뢰재즈페스티벌 실황연주를 담은 [At The Montreux Jazz Festival] 등 주로 공연을 통한 시험무대를 가지게 된다.




Stage 4

Verve, Columbia Years

Back To OJC, And Warner With Eddie Gomez, Marty Morell


빌 에반스는 1970년 녹음된 [Montreux II]부터 당시 20대의 맨해튼 스쿨 졸업생 마티 모렐과 에디 고메즈의 라인업으로 7년 넘게, 빌 에반스 트리오의 고정 라인업으로는 가장 긴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71년, 버브에서 콜롬비아로 자리를 옮겨 [The Bill Evans Album]을 발표한다. 일렉트릭 키보드의 창시자 해롤드 로즈가 빌 에반스를 위해 특별 제작한 일렉트릭 키보드과 일렉트릭 베이스 및 기타까지 빌 에반스가 연주하며 당시 광풍이 불었던 재즈 록 스타일에 편승하려했다. 이런 무리수와 빌 에반스 트리오답지 않은 경쾌함을 추구했다는 자괴감에 실망한 탓인지 이들은 위 앨범의 프로듀서 헬렌 킨과 함께 다시 리버사이드의 모(母) 레이블 판타지/OJC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서 이들은 직선적인 해석력이 돋보이는 1973년 일본실황 앨범 [The Tokyo Concert]와 초창기 빌 에반스 트리오의 재현, 재건에 애쓴 1974년 빌리지 뱅가드 실황앨범 [Since We Met], [Re: Person I Knew] 및 1975년 몽트뢰재즈페스티벌 라이브 앨범 [Montreux III] 등으로 꾸준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마티 모렐의 다소 경직된 플레이에 팀은 분열되었고 빌 에반스는 에디 고메즈와의 듀엣 작 [Eloquence], [Intuition]을 내놨다. 리 코니츠를 참여시켜 1962년의 [Interplay]를 재창출해 보려 했던 [Crosscurrents] 등으로 트리오 포맷에서 벗어난 외도를 하다가 1977년 [Crosscurrent]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드러머 엘리엇 지그문드와 트리오 포맷으로 복귀한다. 미셸 르그랑, 버트 배커락, 자니 멘델 등 히트 작품자들의 레퍼토리로 판타지에 마지막 선물 [I Will Say Goodbye]를 남긴 채 당시 토미 리푸마-알 슈미트 사단의 워너로 마지막 이적을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빌 에반스 트리오의 워너 이후의 업적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그들이 워너 이적 후 처음 발표한 1977년 작 [You Must Believe In Spring]에서 분명 빌 에반스의 죽지 않은 예술성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하모니카의 달인 투츠 틸레망스와 폴 사이먼이라는 팝 스타의 타이틀곡으로 앨범명처럼 상업적으로 마지막 불꽃을 피운 [Affinity], 형의 죽음을 애도한 앨범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이 느껴지는 1979년 작이자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We Will Meet Again]. 이 두 앨범에서 ‘먹튀’의 오명을 극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오히려 깊은 슬픔을 억제하는 듯 일관된 아련함을 선사한다.




Stage 5

Last Days

With Marc Johnson, Joe LaBarbera


1980년 9월 15일 뉴욕에서 코카인 장기 과다 복용으로 인한 폐렴을 동반한 궤양의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된 빌 에반스의 마지막 해는 이미 육체적으로 더 이상 온전한 연주를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수줍음 많고 소곤소곤 말하며 상처받기 쉬운 성격을 지닌 이 천재 뮤지션이 나름대로 꽤 거친 미국의 음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약밖에 기댈 곳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임종을 앞둔 대가를 그래도 마지막까지 보좌한 그의 마지막 동료 마크 존슨과 조 바베라의 충성어린 마음 때문이었는지 빌 에반스는 초창기처럼 그의 타건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최선을 다하였고 드레퓌스 레이블에서 1980년 7월에 발매된 [Letter To Evan]과 그의 타계 일주일 전까지 9일간 샌프란시스코의 키스턴 코너에서 펼쳐졌던 총 32곡 65트랙의 공연 실황을 고스란히 담아 사후 20년에 맞춰 그의 옛 레이블 OJC를 통해 발매된 [The Last Waltz]에선 정말 한 음 한 음 놀라울 정도로 혼신을 쏟아 붇는 정열을 보여주었다. 사후, 각종 레이블을 통해 이전의 녹음물들이 아직도 물밀듯 쏟아지고 있어 빌 에반스 트리오는 죽음을 모르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의 거성인 것만 같다.




Epilogue


지금까지 소개한 대부분은 빌 에반스 트리오 편성의 작품들이며 타 포맷의 앨범들도 많이 소개하려 노력하였으나 [The Tony Bennett/Bill Evans Album] 등 그의 기타 수작들을 열거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또한 위에 언급한대로 부틀렉과 흡사한 실황앨범의 범람과 레이블간의 합병으로 빌 에반스 트리오의 정확한 계보를 열거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음을 밝히며 참조로 빌 에반스 트리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이드맨들과 소속 앨범사들을 열거해보았다.




베이시스트 Teddy Kotick (1956), Scott LaFaro (1959-1961), Chuck Israels (1962-1965),  Gary Peacock (1963), Eddie Gomez (1966-1977), Marc Johnson (1978-1980)  


드러머 Paul Motian (1956-1962), Larry Bunker (1962-1965), Arnie Wise (1966, 1968), Joe Hunt (1967), Philly Joe Jones (1957-1978), Jack DeJohnette (1968), John Dentz (1968), Marty Morell (1968-1975), Eliot Zigmund (1975-1977), Joe La Barbera (1978-1980).  


레이블 Riverside (1956-1963), Verve (1962-1970), Columbia (1971-1972), Fantasy (1973-1977), Warner Bros. (1977-1980)  




이영주 | 음반 프로듀서

버클리음대에서 프로덕션 과정을 전공했으며

각종 음반의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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