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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몽크 & 디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제목 [기획] 몽크 & 디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2017-10-21


전설의 재즈 거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며

델로니어스 몽크 & 디지 길레스피


Thelonious Monk (1917.10.10. ~ 1982.2.17.)

Dizzy Gillespie (1917.10.21. ~ 1993.1.6.)




Monk & Diz


비니(Beanie) 모자를 쓴 채 담배를 피우며 피아노 연주를 하는 델로니어스 몽크의 모습과 동그란 안경에 볼 툭 튀어나온 디지 길레스피의 구부러진 트럼펫. 이는 일반인들도 인지할 정도로 재즈라는 문화예술 장르의 아이콘으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많은 재즈 관련 책자들 뒤지다보면 디지 길레스피는 항상 찰리파커와 함께 언급되며(그것도 뒷자리에) 몽크는 아예 재즈의 대표적인 뮤지션들을 나열하는 항목에 빠져있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큰 음악적 성과를 이끌어낸 기라성 같은 재즈 거인들이 넘쳐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디지 길레스피와 델로니어스 몽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두 거장의 칼럼 청탁을 수락하며 시작부터 고민에 빠졌다. 재즈라는 단어에서 빠질 수 없는 이 인물들에 대한 조명을 각기 할지, 같이 할지에 대한 작은 갈등이었다. 1917년이라는 같은 해에 노스캘롤라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뉴저지주 잉글우드에서 타계하였으며 재즈의 꽃인 밥(Bop) 시대를 이끌었던 공통점을 지녔음에도 너무나 다른 색깔의 두 거장 몽크와 디지. 그들에게 영향 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이들의 교집합으로 자리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지만 마일즈 데이비스를 너무나 싫어했다는 점 이외에 이들의 행보는 너무나 달랐다. 아무리 여기저기 둘러보고 자료를 모아 봐도 동시대 동일 장르에서 최고의 거장으로 칭송받은 이들은 참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이 두 거장들의 행적을 되짚다 보면 재즈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밥 시대의 거의 대부분을 커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민턴즈 - 비밥의 시작, 재즈 아이콘의 탄생


최근 메이저리그 야구 시장에 이채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Players' Weekend’(선수의 주말)라는 이벤트로 선수들의 이름이 아닌 별명을 유니폼 상의 뒷면에 부착하는 것이다. AKA(Also Known As/ 별칭)의 사용은 선수들과 팬들을 더 밀착시키는 분명 큰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이 100년 가까운 초창기 재즈 신에서도 왕왕 존재했었다. 그 대표적인 별명이 뭐 다들 아시다시피 버드(Bird)-찰리 파커 일 것이다. 하지만 디지 길레스피의 이름 디지(Dizzy)가 그의 본명이 아닌 별명인 줄 모르는 이들도 많으며 반대로 몽크를 델로니어스 몽크의 성이 아닌 별명으로 알고 계시는 사람도 간혹 만나곤 한다.


1940년대 초반, 플래처 핸더슨, 얼 하인즈, 듀크 엘링턴, 베니 모튼, 카운트 베이시 등 기존의 초창기 재즈 대가들 밑에서 연명하던 보수적 마인드를 탈피하여 흡사 우리의 홍대 인디 밴드처럼 새로운 의욕으로 출발한 빌리 엑스타인의 밴드가 있었다. (그가 한 말 중엔 비밥의 연주는 버드의 몫이었고 그것을 이용하는 건 디지의 몫이라는 것도 있다.) 엔터테인먼트적인 초창기 재즈에서 탈피한 혁혁한 공을 세운 이 밴드의 구성원 중 핵심 멤버가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이며 여기에는 당시 18살이었던 트럼페터 마일즈 데이비스도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디지 길레스피는 이 밴드의 음악 감독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비밥(Bebop)은 아직도 재즈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인식되고 있다. '빠르게, 더 빠르게'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이 재즈 장르는 그 화려한 리듬과 새로운 화성적 요소를 가미하여 임프로비제이션이라는 즉흥작곡연주로 재즈라는 단어의 뜻을 재차 새기게 된다. 비밥은 뉴욕 맨해튼의 52번가(여기에는 유세프 라티프, 맥스 로치, 허비 행콕, 제이슨 모란에서 앰브로스 아킨무시리 같은 유명 재즈 뮤지션들이 졸업한 맨하튼 스쿨과 록펠러 센터, AXA 파이낸스 센터, 시그램 빌딩, W.C 핸디스 플레이스 같은 랜드마크 이외에도 21클럽, 오닉스 같은 클럽 명소들도 즐비하다)를 중심으로 한 클럽에서 시작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언급되지만 사실은 52번가부터 133번가까지가 ‘스윙 스트리트’라고 불린다. 113가부터 시작되는 광활한 콜롬비아 대학 캠퍼스가 이어되는 지역에 자리한 업타운 할렘 112번가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 House)가 비밥의 시발점이다. 이 민턴즈에서 잼세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소규모 밴드 구성의 즉흥연주는 비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들이 펼쳤던 솔로 위주의 새로운 재즈 스타일의 중심에는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항상 자리했다. 그리고 이 두 혼 주자를 능가하는 개성 만점의 피아니스트가 함께했는데, 그가 바로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이다.




디지 - 존 벅스 길레스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내 삶 전체를 바쳐야 한다.”


“이 음악을 위해 죽은 사람들이 있어. 이것보다 더 진지할 순 없지.”


재즈 전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남무성 작가의 만화책 [Jazz it up!]의 표지 모델로도 등장하는 디지 길레스피는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온 볼과 구부러진 트럼펫(1950년대에 코미디언 댄서들이 그의 트럼펫을 건드리며 넘어지다가 그의 트럼펫이 구부러지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으로 재즈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인물이다. 부풀린 볼(Puffed-out Cheeks)이라고 명기되는, 연주할 때 팽창되는 디지 길레스피의 볼을 두고 일부 클래식 음악인들이 잘못 배워서 저렇다며 폄하하기도 하지만 디지의 주머니(Gillespie's Pouches), 그 익살스러운 트레이드마크야말로 재즈를 친밀하게 만드는 적절한 요소였다. 하지만 의외로 디지 길레스피는 스윙 시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캡 캘로웨이를 칼로 찌르는(실제 이 사건의 범인은 시드니 베세의 유럽 투어 당시 큰 활약을 보였던 트럼페터 조나 존스로 밝혀졌다) 등의 과격함과 다혈질의 인물이기도 했다.


위 서론에서도 언급한 대로 찰리 파커와 함께 비밥, 아니 재즈의 위상을 정립했다는 평을 받는 디지 길레스피는 1917년 10월 21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처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9남매 중 막내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그는 보편적으로 막둥이들이 그러하듯 밝고 쾌활한 개구쟁이였지만 책임감은 남달랐던 듯하다. 농업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학업에도 최선을 다했으며 취미로 배웠던 혼 악기 연주에 있어서도 한, 두 곡을 외워 부르기에 그치지 않고 화성학 등의 이론을 섭렵한 점만으로도 그가 어린 시절 보여주었던 행동력은 재즈계의 리더가 되기에 충분한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디지의 초창기에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리틀 재즈’ 로이 엘드리지가 그 주인공이다. 메이저리그 첫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처럼 로이 엘드리지는 백인 오케스트라에 소속해 함께 연주한 첫 흑인 아티스트로도 기록되고 있다. 스윙 시대 최고의 트럼페터라는 칭송을 받는 이 대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모던 재즈 시대의 트럼페터가 어디 있겠냐만, 디지가 로이 엘드리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남달랐던 듯하다. 로이 엘드리지 때문에 18살에 학교를 박차고 프로 뮤지션을 꿈꾸며 그는 ‘디지’가 되었다. ‘Dizzy’라는 영단어의 뜻처럼 어지럽고 현기증 난다는 그의 별명은 연주할 때 보여주는 현란한 움직임과 비밥의 의미와 딱 맞는 빠르고 다양한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화성의 음악적 진행에 기초하였다. 루이 암스트롱이나 캡 캘러웨이에 영향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는  밴드리더로서 소위 끼 넘치는 행동은 비밥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공연과 딱 맞아떨어졌고 또 그렇게 재즈를 이끌어 나갔다. 청중을 위한 디지 길레스피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는 찰리 파커를 비롯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스윙에 비해 너무나 어려워진, 그래서 비밥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대중의 재즈에 대한 이탈을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요소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찰리 파커를 위시한 당시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술과 마약에 빠져 비즈니스적인 어려움을 겪었을 때 이를 보듬어 이끌어 나간 역할을 담당한 이 역시 디지 길레스피였다. 재즈의 역사에 가장 중시 여겨지는 인물 중 한 명이 찰리 파커이지만 이 찰리 파커를 이끈 이가 바로 디지인 것이다. (내 심장 박동의 절반이라며 버드를 언급한 디지의 인터뷰는 너무나 유명하다.) 찰리 파커와 제이 맥샨 밴드의 사보이 공연의 멤버였던 버드와 게스트로 참여한 디지는 진부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초창기 밥에서 탈피하고픈 공동의 목표 때문인지 급속도로 친밀해졌다. 찰리 파커가 제이 맥샨 밴드를 떠나 얼 하인즈에 합류한 것도 디지 때문이며 이후, 빌리 엑스타인으로 함께 이적한 것도, 노먼 그란츠의 JATP(Jazz At The Philharmonic)에 참여하며 명작을 만들게 된 것도 디지 길레스피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갑내기 최고의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가 스캣에 눈을 뜨게 한 것도, 사라 본이라는 백업 피아니스트를 재즈 디바의 반열에 올라갈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것도, 유엔 오케스트라를 통해 파퀴토 디리베라와 아투로 산도발을 세상에 알린 것도 모두 다 디지의 공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디지가 재즈사에 남긴 혁혁한 성과는 그 자신의 리더작과 사이드작을 떠나 타인의 음악적 행보에도 수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델로니어스 스피어 몽크


“틀린 것이 맞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방식으로 연주하라 말하지. 대중들이 원하는 걸 연주하지 마.”


“마일즈가 나를 쳤으면, 바로 죽었을걸.”


남들이 ‘예스’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하던 카피의 광고가 있었다. 현란한 비밥.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속주를 연마해야했던 1940년대 뉴욕의 음악시장에서 우직하게 당시엔 잘못된 화성의 절대 노트들만 타건하던 독특한 개성의 연주자, 그래서 더욱더 주목받았던 남다른 재즈맨이 델로니어스 몽크이다. 1917년 10월 10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로키마운트에서 출생한 그는 다섯 살에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 교회 전도사들의 동행 연주인이 되었다. 스트라이드 피아노에 영향받으며 줄리어드 스쿨을 잠시 드나든 이후, 할렘의 민턴즈에서 찰리 크리스천, 케니 클락 등과 연주하던 중 우연히 들렀던 찰리 파커와 잼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당연히, 디지 길레스피와도 면식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몽크는 독창적인 것이 최고라는 점을 인식한 듯하다. 몽크는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너무나 과묵한 (<다운비트>의 블라인드폴드 테스트에서 한 질문에 자신의 부인에게나 물어보라는 기록은 아직도 재즈사에 회자되고 있다.) 무관심과 괴기한 성격의 소유자로 동료 연주자들에게 마저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몽크의 이런 음악적 스타일을 구제하여 이끌어 준 이는 블루노트의 수장 알프레드 라이온과 프레스티지 레이블의 대표 밥 와인스톡이었다. 이 두 거장 프로듀서가, 특히 1947년 자신의 블루노트 레이블과 5년간 계약을 체결한 알프레드 라이온이 당시, 소위 ‘또라이’ 아티스트 델로니어스 몽크를 영입한 이유는 그의 기인적인 연주, 해석력과 외형적인 독특함이 주는 스타성이지 않을까 싶다.


이 두 거장의 레이블에서 몽크가 보여주었던 코드 보이싱 안에서의 강력한 텐션 사용이 다른 악기의 솔로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자신의 작품 이외에는 사이드맨으로 외면받던 이유가 되었다는 자료도 존재하지만 또 한편 아방가르드 스타일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많은 긍정적 주장도 공존한다. 실제로 몽크의 추종자들은 아방가르드, 프리 재즈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많다. 세실 테일러, 앤드류 힐, 앤소니 데이비스에서 얼마 전 타계한 제리 알렌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본 칼럼을 위해 필자가 이런저런 기록들을 뒤지기 전에 잘못된 이해가 하나 있다. 왜 몽크는 사이드맨으로의 참여가 거의 없었을까, 하는. 그의 기이한 음악적 행보가 비협조적인 앙상블에서의 과정과 팀의 조화를 망쳐버리는 결과 때문이었겠지, 했던 생각은 옳지 않았다. 그는 1940년 케니 클락을 통해 민턴즈에 발을 들여놓았다. 1944년 콜맨 호킨스 쿼텟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악평을 들어야 했다. 1946년 스팟라이트를 통해 디지 길레스피의 피아노 세션으로 잠시 조우한 뒤로 1952년 밀트 잭슨의 [Wizard Of The Vibes], [Blue Note]에 게스트로 초대받기 전까지 몽크의 사이드맨 기록은 없다. 필자는 그 역사의 정답을 찾았다. 의리 때문이었다. 정작 자신은 무죄 판결을 받았던, 마약 소지에 관련한 뉴욕 경찰과의 사건에 동료 연주인들을 위한 증언 거부로 뉴욕 클럽에서의 공연 면허증(사실, 이 면허도 허위였던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을 박탈당하여 사이드맨의 참여를 배제당할 수밖에 없었고, 작곡 활동만으로 제약받는 진짜 잃어버린 6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1952년은 [More Genius]라는 알프레드 라이온과의 1947년 블루노트 계약 이후 작업 진행된 몽크 자신의 리더작이 발표된 해다. 그의 첫 리더작부터 천재라는 단어를 썼는데 당시부터 그의 이러한 이론과 표현을 천재적이라고 다들 인정하였느냐는 점 역시 필자에게는 의문이다. 또 튀는 행동과 이론은 기존의 기득권자들에게 배척당하기 마련인데 당시 동료 연주인들이 몽크를 천재로 받아주었다는 것은 그의 음악적인 면 이외에 뭔가가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의아한 부분이다. 마일즈의 언급에 따르면 몽크는 당시 비밥인들 사이에 가장 무서운 싸움꾼이 아니었나 하는 유추를 해볼 수는 있다.


프로듀서 알프레드 라이온과 밥 와인스톡의 언급이 나왔기에 또 다른 전설의 재즈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와 몽크의 일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오린 킵뉴스가 남긴 명작 중 하나는 1956년 12월 녹음작 [Brilliant Corners]다. 몽크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이 걸작은 리버사이드라는 레이블이 정상의 자리에 지속하게 한 일등공신이기도 했지만 엘비스가 상업시장을 장악한 미국 음반 시장에서 아무리 기인이라 해도 몽크에게 큰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기는 어려운 현실이었을 테다. 만족스럽지 못한 130달러로 계약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린 킵뉴스와 계약한 1955년은 몽크에게 전설로 가는 명성이 찾아들기 시작한 해이다.




디지 #2


“디지 길레스피는 비밥의 머리와 손이자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인물이었다.” - 마일즈 데이비스


앞에서 언급한대로 디지 길레스피는 유년기에 화성학 등의 음악이론을 공부했을 정도로 일찍이 뮤지션으로의 꿈을 꾸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트롬본으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당시 비밥의 뮤지션들이 블루스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에 반해 딕시랜드의 즐거운 정통을 답습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첫 프로 데뷔였던 테디 힐 밴드에서부터 장난기 많은 기행을 보였던 디지 길레스피는 로이 엘드리지를 우상으로 그를 따라 하기에 주력하였으나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 했고 그 결과 비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재즈라는 장르가 록의 엄청난 물결에 뒷전으로 쳐졌을 때 찰리 버드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을 영입했다. 명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의 지휘 아래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 등 젊은 백인 연주인들을 끌어들여 기획된 보사노바라는 뉴웨이브는 레이블 버브를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더불어 재즈의 명맥을 이을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70년대에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록과 재즈의 융합인 퓨젼 재즈라는 새로운 스타일로 재즈의 색다름을 선사했다. 그리고 MTV와 알앤비, 힙합의 장르로 대중음악이 확산되며 재즈의 존재가 아주 불투명해질 80년대에 디지가 또 다시 등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비밥의 창시자라 주창했던 디지는 비밥의 전형적인 편성인 스몰 앙상블보다는 빅밴드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했고 라틴 재즈로 그 인생의 후반기에 음악적 방향을 바꾸게 된다.


디지의 라틴 재즈는 배고픔을 떨치기 위한 얄팍한 자리 이동이 아니었다. 일찍이 준비된, 그가 음악적으로 보여줄 당연한 수순이었다. 디지 길레스피는 재즈 씬에서 폴리리듬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사실 창시자보다는 재즈 씬에서의 얼리어답터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비밥에서 b5 또는 #11의 강조가 비밥, 모던 재즈의 특성이라면 디지 길레스피의 1945년 작품인 ‘Shaw Nuff’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라틴 재즈, 혹은 쿠반 재즈로 불리는 아프로쿠반 재즈의 시작 역시 1947년 그의 빅밴드를 통해서였다. 재즈 마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당시 디지에게 라틴 재즈의 영광을 선사한 이는 쿠바 퍼커션(콩가/봉고) 연주자 차노 포조 곤잘레스이다. 다혈질의 이 쿠바 연주자이자 작곡가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할렘의 한 바에서 다툼 끝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살해당하지만 않았어도 부에노 비스타의 영광은 한참 이전으로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디지 길레스피는 그 자신의 녹음에 대해 격찬을 받지는 못했지만 재즈 씬에서 개척자로서 보여준 마일즈 데이비스의 성과 못지않게 디지 길레스피의 운신 역시 재주목받을 만 하다. 개인적으로 디지 길레스피에게 아쉬운 부분이 있다. 40년대 전반부터 그렇게 친밀했던 버드와 디지. 1946년 미 서부 지역에 비밥의 전도를 위해 떠난 그들은 당시 할리우드 지역민의 낮은 지적 수준에 실망하여 뉴욕행 비행기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마약중독에 빠져있던 찰리 파커는 그 비행기 티켓을 마약과 맞바꾸게 되고 이는 찰리 파커를 혼돈의 나락으로 빠뜨려 이른 천재의 비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이때, 디지가 버드를 보살폈다면, 버드를 위한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다시 구입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찰리 파커가 타계 일주일 전 디지를 찾아와 마지막 연주를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것만으로 모든 일들이 종결되어버린 것일지라도.




몽크 #2


“재즈는 자유야. 넌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해.”


디지 길레스피가 비밥 스타일을 만들어내며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대리 코드를 통한 하모닉에서의 능수능란했던, 예상치 못한 진행 때문이었다. 클래식곡이나 팝의 멜로디를 차용하는 상업성도 갖추었으며 스타카토 주법으로 코드 스케일의 상행으로 치닫다가 리가토로 하행하며 청자들의 긴장감을 해소시키는(지금은 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음악적 진행은 비밥, 모던 재즈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델로니어스 몽크의 코드 진행과 멜로디는 완전히 또 다른 얘기이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코드 진행에서 즉흥연주를 할 때 감성적으로 대응하던 것과는 달리 몽크는 철저하게 색다른 이성적 표현으로 접근했다. 논리적이거나 엉뚱함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몽크의 음악은 균형의 조화와 파괴를 예측 불가능한 자리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자 재즈사에 가장 많이 연주되는 대표곡 ‘'Round Midnight’ 같은 발라드곡들을 보다는 ‘Off Minor’와 ‘Blue Monk’, ‘Straight, No Chaser’ 같은 곡들에서 들려주는 단순함 속에서 독창적으로 변모하는 프레이징의 반복은 당시 스윙이나 비밥 이상을 추구하던 뮤지션들에게는 한 가닥 빛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예로 ‘Misterioso’라는 몽크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독특한 사상은 여지없이 표출된다. 고음과 저음의 교차가 블루스의 12마디 패턴으로 이어지는데 리가토 기법의 8분음표들은 딱 그만큼의 간결함으로, 당시는 너무나 혁신적인 표현력이었다. 델로니어스 몽크에게 영향을 미친 초창기 재즈 아티스트로 패츠 월러나 얼 하인즈, 듀크 엘링턴 등이 언급되곤 한다. 스트라이드 주법이나 코드 보이싱 때문인 것 같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의 주 역할이 카운트 베이시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콤핑이었다면 이는 몽크에 적합한 언사가 아니다. 몽크는 앙상블의 콤핑 파트에서 아예 연주를 멈춘 경우도, 심지어는 자리를 뜬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기이한 행동은 디지가 보여주었던, 철저하게 관객들을 위해 노력했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다. 오히려 이러한 기이한 행동이 재즈맨들의 위상을 ‘연주자와 청자’라는 당시의 갑을 관계의 을의 지위에서 ‘우상의 아티스트’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몽크의 음악적인 언급에 필자는 항상 홀 톤 스케일(Whole Tone Scale)을 말하곤 한다. 6음 구성으로 토닉, 장2도, 장3도, 증4도, 증5도, 증6도로 구성되는 온음 음계인 홀 톤 스케일에서 마지막 Aug6는 min7의 대용이 가능하기에 도미넌트 세븐(#5)에 해당하는 스케일로 전환 가능하다. 이는 당시 화성학상 다른 악기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한 점은 현악기로서의 피아노가 아닌 타악기로서의 피아노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 몽크만의 독특한 뇌 구조에 그 답이 존재할 수도 있다.


당시만 해도 오류로 간주되었던 이 불협화음들의 채용이 버드 파웰을 비롯한 이후의 재즈맨들에게는 재즈 화성 특유의 본질로 받아들여졌다. 비밥 재즈 스타일에 스케일의 속주로 점철된 버드 파웰과 정반대의 표현력을 내세운 몽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둘은 너무나 친한 친구였던 점 역시 델로니어스 몽크가 적어도 범인(凡人)은 아니라는 방증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콤핑에 머물러 있던 초창기 재즈에 있어서 피아노의 역할을 텐션과 속주로 격상시킨 재즈 건반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몽크 사후에 몇몇 의학 관계자들은 델로니어스 몽크가 신경쇠약 증세를 동반하지 않는 자폐증인 아스파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의 장애를 가졌던 것으로 의견 제시한 적이 있다.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글렌 굴드, 스탠리 큐브릭 등 소위 천재 중의 천재로 칭송받는 많은 이들이 이 뇌 질환 환자로 분류되어있다. 이들은 인간의 문화와 과학 분야를 통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이상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들 속에 델로니어스 몽크 역시 자리하고 있다.




[Jazz At Massey Hall]


연초에 ODJB(오리지널 딕실랜드 재즈 밴드)가 발표한 첫 재즈 레코딩 음반을 기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2017년, 올해는 이 음반이 나온 지 100년이 되는 해이며 많은 재즈 거장이 탄생한 100주년이라는 언급을 하였다. ‘매직 터치’ 태드 다메론, 허비 행콕의 ‘Watermelon Man’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라틴 퍼커션 연주자 몽고 산타마리아, 영화 <위플래쉬>의 주인공이 동경했던 최고의 재즈 드러머로 “능력 없으면 록이나 해라”라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던 버디 리치뿐만 아니라 엘라 피츠제럴드라는 최고의 목소리가 탄생한 것도 쉬이 지나칠 수는 없다.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언급하려는 두 재즈 거장 역시 1917년에 태어나 인류 문화에 소멸되지 않을 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절대 어울리지 않는 물과 기름 같았던 디지와 몽크, 이 두 거장의 탄생 백주년을 기리는 글을 마치며 억지로라도 언급해야 할 마지막 단어들이 있다. [Jazz At Massey Hall]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이다. 195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이 실황 음반은 재즈사에 영원히 기억될 명반이자 계약관계 때문에 찰리 챈으로 명기된 찰리 파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지되고 있다. 찰스 밍거스, 버드 파웰, 맥스 로치가 함께했으며 그리고 디지 길레스피 역시 이 대 기록에 빠질 수 없는 트럼페터로 활약했다. 그의 대표곡으로 인기 높은 ‘Salt Peanut’과 ‘A Night In Tunisia’도 수록된 이 전설적인 기록에 델로니어스 몽크 역시 수록곡 ‘52nd Street Theme’의 작품자로 이름을 올렸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바로 전까지 이 곡의 작곡가가 찰리 파커인 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몽크 자신은 한 번도 이 곡의 녹음을 한 적이 없다.)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찰리 파커는 완전히 분리된 동떨어진 새로운 음악이 비밥이라고 했다. 이 창작물의 창시를 위해 댄스 음악 스윙처럼 질서정연하지 않은 디지와 몽크의 시도가 당시 획기적인 신 재즈를 창출해내었고 그래서 모던 재즈의 기초가 되었듯, 필자의 이번 칼럼도 큰 주제 아래 즉흥적으로 써 내려갔다.


중구난방이 되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던 차에 비보를 접했다. 존 에버크롬비가 타계했다는 기사였다. 후대가 그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관심 없다. 적어도 미국 유학 시절 틈만 나면 그의 공연을 쫓아 다니던 필자에게는 말이다. 재즈의 거장 탄생 기사를 쓰는 중에 또 다른 거장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너무 아이러니하지만 또 이게 사는 거고, 세상이 이런 거고, 뭐 그렇다.  


* 개리 기딘스, 스콧 드보 저/ 황덕호 역의 <재즈 기원에서부터 오늘날까지>와 요아힘 베렌트 저/한종현 역의 <재즈북 래그타임부터 퓨젼 이후까지>에서 작은 일부를 참조했음을 알립니다.




이영주 | 음반 프로듀서

버클리음대에서 프로덕션 과정을 전공했으며

각종 음반의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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