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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연의 재즈 탐미] 존 애버크롬비를 기리며  
제목 [양수연의 재즈 탐미] 존 애버크롬비를 기리며   2017-10-21

양수연


바다의 꿈을 꾼 현자

존 애버크롬비를 기리며


존 애버크롬비(1944~2017)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4년 5월 초, 맨해튼 재즈 스탠더드 클럽에서 마련한 ‘프레드 허쉬 듀오 시리즈’에서였다. 프레드 허쉬는 5월 6일 트럼페터 랄프 알레시를 시작으로 커트 엘링, 케이트 맥개리, 아냇 코헨과 매일 밤 듀엣 공연을 했고 5월 11일 마지막 날 존 애버크롬비와 협연했다. 프레드 허쉬와 존 애버크롬비라는 대연주자들의 생애 첫 공연이었기에 나 역시 기대가 컸다. 프레드 허쉬와 기타리스트 줄리안 라지 듀오와는 분명히 다를, 새로운 무대가 될 것이었다. 애버크롬비와 허쉬의 듀오는 기타-피아노 듀오에서 하기 마련인 멜로디와 리듬이 서로 간 오밀조밀 엮이고 서로 풀어주는 식의 연주는 하지 않았다. 때론 그들은 의기소침해 보였다. 애버크롬비는 공연 내내 앉아서 무표정하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연주했고 앙코르 요청의 쇄도에도 무대 뒤로 혼자 사라져버렸다. 결국, 프레드 허쉬는 솔로로 앙코르곡을 연주했다.


나중에 프레드 허쉬에게 이날 애버크롬비와의 공연에 대한 느낌을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허쉬는 그날 연주에 나름의 불만을 토로했다. “솔직히 다시 애버크롬비와 연주하게 될 것 같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프레드 허쉬는 애버크롬비가 풀 코드를 많이 쳤기 때문에 자유롭게 연주하기 힘들었노라고 고백했다. 청중으로서 나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창의적이고 자아가 강한 두 사람의 연주가 서로 중복되는 느낌이 있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별로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그날 애버크롬비의 고지식하고 집요한 멜로디에 대한 집착과 수많은 아이디어를 봤다.



2014년 5월 11일. 내가 마지막으로 본 존 애버크롬비와 프레디 허쉬의 듀오 공연. 애버크롬비가 무대로 사라진 뒤 프레디 허쉬가 혼자 앙코르곡을 연주하고 있다.


애버크롬비야말로 피아노 듀오 연주를 즐기는 사람이고 여러 장의 피아노 듀오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애버크롬비와 피아니스트 리치 베이락과의 연주 [Emerald City], 앤디 라번과의 세 장의 듀오 앨범을 보라. 그리고 마크 코플랜드와의 2011년 듀오 앨범 [Speak To Me]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애버크롬비는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피아노로 작곡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피아노로 만들어진 작품을 기타로 구현시키는 것은 기타로 직접 작곡하는 것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고 즐겁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말년까지 실험을 거듭했던

애버크롬비의 탐구적 생애


기타리스트 존 애버크롬비는 1944년 12월 16일 뉴욕 포트 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기타를 처음 시작한 건 14살 때였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보스턴의 버클리 음대에 다녔고 잭 피터슨을 사사했다. 보스턴의 폴스 몰 재즈클럽에서 연주하면서 오르가니스트 자니 해먼드 스미스 그룹과 활동했고 이후 마이클 브레커 형제와도 5년간 이력을 쌓았다. 1969년 뉴욕으로 돌아온 후 빌리 코햄, 브레커 형제와 함께 코햄의 재즈-록 밴드 드림스(Dreams)에 합류했다. 천재적인 애버크롬비를 본격적으로 알린 밴드였다. 1971년에는 색소폰 주자 가토 바비에리, 1972년에 피아니스트 베리 마일스, 1974년에는 길 에반스와 협연하는 등 그즈음 애버크롬비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톱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1973년 ECM 레이블 창립자 만프레드 아이허와 만남은 앞으로의 음악적 방향을 결정짓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애버크롬비는 잭 디조넷, 얀 해머와 함께 첫 솔로 앨범 [Timeless]를 발표하며 그 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남긴다. 애버크롬비의 전설적인 트리오, 잭 디조넷, 데이브 홀랜드와의 게이트웨이(Gateway)가 남긴 연주는 초기 ECM의 명연주였다. 게이트웨이는 1976년 첫 앨범을 냈고 1977년 [Gateway 2], 17년 만에 재결합해 화제가 되었던 1994년 [Homecoming], 1995년 [In The Moment] 등 네 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게이트웨이 이후 애버크롬비는 전통적인 어법으로 돌아가기 위해 리치 바이락(피아노), 조지 므라즈(베이스), 피터 도널드(드럼)와 함께 쿼텟을 결성하여 [Arcade](1978)와 [M](1980)을 내놓는다. 이 시기에 랄프 타우너와 함께 한 협연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1976년 앨범 [Sargasso Sea], 1981년 [Five Years Later]는 최전선에 선 두 기타리스트의 드라마틱한 교감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80년대는 애버크롬비에게 사운드 실험의 장이 되었다. 80년대 그는 롤랜드 기타 신디사이저로 많은 실험을 했다. 그는 기타의 어떤 사운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다양한 장비를 도입했고 문을 걸어 잠그고 사운드 실험에 몰두했다. 마크 존슨(베이스), 피터 어스킨(드럼)과 함께한 [Current Events](ECM/1986), 마이클 브레커를 소개한 [Getting There](ECM/1988), [John Abercrombie Marc Johnson Peter Erskine](ECM/1989) 등에서 롤랜드 기타 사운드로 무한한 느낌의 사운드 팔레트를 선보였다.


그러나 애버크롬비는 이내 기타 신디사이저의 사운드에 싫증을 느꼈고 90년대 초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기술적 요소를 도입해서 극한의 실험을 하지만 그것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다. 존 애버크롬비의 강점은 그가 ‘고전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60년대 재즈를 그의 고향처럼 생각했다. 진부함을 벗어나고자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려는 그런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혁신을 생각하지만 혁신에 매여있지 않았다. 그는 진보주의자, 변화무쌍한 자라는 수식보다는 향수와 그 내면의 본연의 소리에 집중했던 사람이다. 그 내면의 소리와 맞지 않으면 그 아무리 훌륭한 기술의 요소들도 과감히 내려놓았다.


애버크롬비의 도전적인 자세는 90년대 들어와도 멈출 줄 몰랐다. 드러머 아담 누스바움과 오르간 주자 제프 팔머가 참여한 이른바 애버크롬비의 ‘프리 재즈 트리오’의 작품들은 애버크롬비의 음악적 탐구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92년 [While We're Young], 1994년 [Speak Of The Devil], 1997년 [Tactics]는 애버크롬비의 고전적이면서 자유롭고 폭넓은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앨범들이다. 애버크롬비의 탐험은 거침없었다. 99년에는 기존의 프리 재즈 트리오에 트럼페터 캐니 휠러, 바이올리니스트 마트 팰드먼, 색소포니스트 조 로바노를 추가하여 프리 재즈 앨범 [Open Land](ECM/1999)를 발표한다.


근래에 애버크롬비가 새로 꾸린 쿼텟은 애버크롬비의 도전성, 실험성, 60년대의 향수, 안정성 모든 것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게이트웨이를 애버크롬비의 가장 유명한 프로젝트로 꼽지만, 나는 2000년대 이후 피아니스트 마크 코플란드와 베이시스트 드루 그레스, 드러머 조이 배런과의 앙상블이 애버크롬비 자신에게도 더없는 즐거움을 줬던 프로젝트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치 베이락에 이어 25년 만에 피아니스트(마크 코플랜드)를 영입하여 새로운 작품들을 쏟아냈다. 히치콕 영화의 제목을 딴 [39 Steps](ECM/2013), 유작인 된 [Up And Coming](ECM/2017)은 말년의 애버크롬비의 음악적 이상이 표상된 훌륭한 작품들이다.




애버크롬비는 존 콜트레인과 소니 롤린스 등 그를 매료시켰던 옛 영웅들을 언제나 그리워했다. 존 콜트레인의 곡 ‘Wise One’을 특별히 사랑해서 [Within A Song](ECM/2012)에 수록했다. 특히, 이 앨범에는 콜트레인 등 어린 시절 재즈의 영웅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타이틀곡 ‘Within A Song’을 담았다. 애버크롬비는 이 곡을 좋아해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에도 자주 이 곡을 시범으로 연주하곤 했다.


흔히 존 애버크롬비를 말할 때 ‘다양성’, ‘다원화’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앨범마다 색깔이 다르다던가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버크롬비는 정확한 목표와 흐름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애버크롬비는 뚜렷한 사람이다.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그냥 하는 사람이다.  애버크롬비가 늘 말했듯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음악을 연주할 뿐”이었다.


프레드 허쉬와의 ‘불편한’ 듀오가 나에게는 아름답게 들렸던 것은 애버크롬비 그가 지금 하고 싶은 음악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애버크롬비가 피아노와 꿈꾸었던 것은 서정적이고 풍부한 어떤 물결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 물결을 타고, 때론 그 물결을 파고들면서 멜로디를 확장하고 깊이 있게 포괄하고 거대한 우주의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애버크롬비는 바다처럼 얽매임 없이 스스로 요동치며 그 속에 살고 있는 존재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애버크롬비 음악은 때론 바다처럼 고요하고 때론 바다처럼 거칠며 바다처럼 다채롭고 바다처럼 울적하며 바다처럼 고요하다. 나는 프레디 허쉬와의 협연은 애버크롬비가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는 잔잔한 물결을 탄 음악은 아니었을지언정 두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변덕스럽게 출렁거렸던 깊은 바다의 느낌을 충분히 전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애버크롬비의 음악은 그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제 애버크롬비 그 자신을 떠난 것이며 바다를 움직이는 더 큰 기운과 그것을 느끼는 청중의 미감으로 온전히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애버크롬비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 뚜렷한 애버크롬비의 물결이 화석처럼 내 마음에 찍혀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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