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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연의 재즈 탐미] 리 모건, 하드밥 마지막 천재를 기리며  
제목 [양수연의 재즈 탐미] 리 모건, 하드밥 마지막 천재를 기리며   2016-08-15


리 모건, 하드밥 마지막 천재를 기리며


“두 사람은 지하실로 내려가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저도 방해된다고 내려오지 못하게 했죠.”


나를 사로잡는 리 모건의 이미지는 아내가 질투할 만큼 가까웠던 천재 트럼페터 클리포드 브라운, 그 앞에 선 꽃다운 열여섯 청춘의 모습이다. 리 모건이 처음 트럼펫을 분 순간 바로 이 악기임을 알아챘듯 클리포드 브라운을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가 그의 진정한 멘토임을 직감했다.


“클리포드 브라운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나의 최고의 우상이었죠. 클리포드를 알고 나서야 트럼펫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깨닫게 됐어요.”




클리포드 브라운과 리 모건


그들은 여덟 살 나이 차가 있었지만 음악 천재 소리를 듣고 자라난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이었다. 열다섯에 트럼펫을 시작한 클리포드 브라운은 3년 뒤에 프로 연주자가 되었고 열세 살에 트럼펫을 시작한 리 모건은 5년 뒤에 디지 길레스피 밴드에 들어간다. 1954년 초부터 시작된 이들의 우정은 1956년까지 2년간 이어졌다. 최고의 트럼펫터로 승승장구하던 클리포드 브라운이 이제 고등학생 리 모건과 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심히 나누었을까? 나는 클리포드 브라운의 아내 로류가 귀를 쫑긋했던 그들의, 그 지하계단 입구에서 서 있는 듯 머뭇거리며 그들을 상상하곤 한다. 리 모건의 초기 레코딩에서 보석처럼 깨끗하고 날렵한 클리포드 브라운의 사운드가 느껴질 때처럼 미소를 지어볼 뿐.


그러니까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그해, 1956년. 리 모건에게 1956년은 얼마나 격정적이었던가. 리 모건의 고향 필라델피아에 온 아트 블래키와 만나 연주했고 얼마 안 되어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에 들어갔다. 디지 길레스피는 조 고던을 갓 고등학생이 된 리 모건으로 교체한 후에 리 모건에게 마음껏 솔로의 기회를 줬다. 정상의 연주자들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고 연주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6월 26일, 그는 클리포드 브라운과 필라델피아의 뮤직시티에서 잼 세션을 가졌다. 피아니스트 리치 파웰도 참여했다. 이들은 리 모건과 연주가 끝나면 시카고의 블루노트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리치 파웰의 아내 낸시 파웰이 운전을 했다.


리 모건은 뉴스를 통해 그의 멘토 클리포드 브라운과 리치 파웰 부부의 부고를 들었다. 참혹한, 너무나 참혹한 빗길 교통사고였다.


[Lee Morgan Vol. 3](Blue Note/1957)에 수록된 리 모건의 명곡 ‘I Remember Clifford’에서  클리포드 브라운을 잃은 리 모건의 비애와 그들의 우정을 상기한다. 원작자는 베니 골슨이고 도널드 브리드가 클리포드 브라운 사후 처음 녹음했지만, 이 곡은 리 모건의 연주로 들어야 할 것만 같다. 여전히 그들의 지하실 계단 앞에서 머뭇거리는 심정으로. 그러나 1956년이 리 모건에게 조금도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았듯 수많은 기회와 도전이 주어진 리 모건을 알기 위해서는 스물두 살까지 무려 열한 장의 앨범을 초고속으로 내어놓은 리 모건을 따라가야 한다.




클리포드 브라운을 잇는 새로운 스타


클리포드 브라운의 죽음 후 재즈씬에서는 새로운 영 스타를 찾고 있었다. 리 모건은 마땅히 그 자리에서 가장 우뚝 선 연주자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인 1956년 11월 4일, 리 모건은 블루노트에서 데뷔 앨범 [Indeed!]를 녹음한다. 또 바로 이튿날 5일과 7일에는 사보이 레코드에서 [Introducing Lee Morgan] 앨범이 녹음된다. 당대 최고의 재즈 레이블들이 그를 탐내고 있었다. [Introducing Lee Morgan] 앨범은 행크 모블리 퀸텟에 리 모건이 붙여져 잼세션 형식으로 녹음된 것인데 열여덟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연륜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듬해 1957년, 열아홉 가을에는 존 콜트레인의 전설적인 [Blue Train] 앨범에 참여했고 1958년 디지 길레스피 빅밴드가 해체된 후 리는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3기)에 들어가 역작 [Moanin’]을 녹음한다. 1961년 헤로인 중독으로 재즈 메신저스에서 퇴출당하기 전까지 [The Big Beat](1960년 3월 30일 녹음), [A Night In Tunisia](1960년 8월 7일&, 4일 녹음) 등 굵직굵직한 앨범들을 녹음했다. 프레디 허버드로 리 모건의 자리가 교체된 후 리 모건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 필라델피아로 돌아갔다.


과거 천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그는 음악과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혼신의 힘으로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 클럽이었지만 지미 히스와 이따금 만나 연주했고 곡도 많이 썼다. 그렇게 나온 리 모건의 컴백 앨범은 기대 이상이었다. 1963년, 뉴욕으로 돌아온 리 모건은 최대 히트작 [The Sidewinder]를 녹음했다. 조 핸더슨(테너 색소폰), 배리 해리스(피아노), 밥 크랜쇼(베이스), 빌리 히긴스(드럼)이 참여한 이 앨범은 싱글 ‘The Sidewinder’로 1964년 12월 19일에 빌보드 차트 탑 100에 진입하여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리 모건의 아름다운 보사노바 발라드 ‘Ceola’가 수록된 명반 [Cornbread]은 1965년 9월에 녹음됐다. 리 모건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뒤 그렇게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또 다른 리 모건의 이미지는 그의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것이다. 당시 세상이 떠들썩했던 그 사건은 지금은 사랑을 공부하거나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나 회자될런지.


1972년 2월 19일, 리 모건은 자기가 연주하던 클럽에서 연인 헬렌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리 모건이 열 살 연상의 헬렌을 버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헬렌은 누나이자 엄마 같은 존재였다. 리 모건이 마약의 길로 계속 빠지지 않았던 것도 헬렌의 도움이 컸다. 헬렌은 어린 시절 리 모건에게 트럼펫을 처음 선물하고 음악의 길로 적극 이끌었던 친누나 어네스틴, 그녀를 연상시키는 존재였다. 질투심에 휩싸인 헬렌은 리 모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그는 즉사했다. 리 모건의 흥건한 피를 보고서야 헬렌은 리 모건을 껴앉으며 울부짖었다. “내 사랑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불과 서른셋, 천재적인 뮤지션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났다. 그 나이 젊은 남정네에게서 흔히 있는, 여자 문제로는 결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진정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1972년, 리 모건의 죽음은 하드밥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트 블래키, 마일스 데이비스, 호레이스 실버, 존 콜트레인, 행크 모블리, 조 핸더슨 등등, 모던재즈 연주자들이 잇달아 하드밥 앨범을 내놓았던 그 시기는 이미 끝이 났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포함해 많은 연주자가 변화를 선택할 때 서른셋에 삶을 마감한 천재 리 모건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즈신은 리 모건을 이어갈 또 다른 영 스타를 찾는 것도 잊은 듯했다. 어찌 아니겠는가. 그 시대 나에게 마지막 영재는 리 모건이다. 그는 블루노트에서만 스물다섯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리듬 곳곳에 강조점을 찍으며 트럼펫 밸브를 반쯤 누른 채 쏜살같이 휘젓는 멜로디같이,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앞만 보며 쏜살같이 살다가 가버렸다.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나, 그 상상의 지하 계단 앞에서 귀를 쫑긋한 채 아쉬움과 사랑과 그리움에 먹먹해져있는 나일뿐이다.



양수연 | 재즈 칼럼니스트

1997년 국내 최초의 유로 재즈 월간지 [재즈 힙스터]를 발행했다.

재즈와 요리를 사랑하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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