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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힙합] 퀸시 존스 [Back On The Block]  
제목 [재즈×힙합] 퀸시 존스 [Back On The Block]   2016-08-15


퀸시 존스 [Back On The Block]


재즈를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올리다


퀸시 존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중들에게 퀸시 존스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건 그가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면서였으니까. 여기서 발전하더라도 레코드 프로듀서의 영역을 넘어서지는못한다. 사실, 퀸시 존스는 프로듀서로 활동하기 이전에 재즈 트럼페터이자 빅밴드 리더였고, 재즈 편곡가이자 작곡가였다. 그런 그가 1989년에 앨범을 한 장 냈다. 제목은 [Back On The Block]. 프로듀로서가 아닌 자신의 앨범이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온전한 재즈 앨범도 아니었다.




편곡가, 빅밴드 리더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흑인 인구의 90%는 남부에 머물고 있었다. 노예제에서 해방이 되었음에도 남부 주의 대농장에서 목화를 채집하는 소작농의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일하며 특별한 능력을 키울 기회가 없던 흑인들에게는 당연한 삶이었다. 퀸시 존스의 부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켄터키에서 목수로 일했으며, 퀸시 존스의 증조모는 루이빌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자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북부 주들에선 공장에서 일손이 절실했고, 비교적 싸게 쓸 수 있는 미국 남부의 흑인 농부들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에게 북부로 오는 기차표를 무료로 제공했다. 흑인들에게도 득이 되었다. 북부의 공장에서 얻는 수입은 목화를 따는 것의 몇 배가 넘었으며, 상대적으로 평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자식들에게는 자신들이 누리지 못한 교육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흑인 대이동’은 20세기 초에 본격화되어 남부의 흑인 인구는 크게 줄었다. 퀸시 존스의 부모도 미국 중서부 도시인 시카고로 옮겨갔고, 퀸시 존스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퀸시 존스의 어머니는 늘 종교음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음악 교육을 받기 전의 퀸시 존스에게 음악은 이미 삶의 큰 일부였다. 음악에 본격적으로 빠진 것은 12살 때였으며, 고등학생 시절에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주로 트럼펫을 연주했으며 편곡에도 관심이 많았다. 14살이 되었을 때는 남부 플로리다 주에서 올라온 맹인 소년의 연주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두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이자 흑인 가수였다. 넋이 나간 채 연주를 지켜보던 퀸시 존스에게 옆에 있던 관객은 그의 이름이 레이 찰스라고 일러주었다.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발휘한 레이 찰스에게서 퀸시 존스는 음악적 자극을 받게 된다.

 

순탄한 삶이 이어졌다. 시애틀 대학의 음악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얼마 못 가 버클리로 둥지를 옮기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는다. 유럽 투어를 떠나는 라이오넬 햄튼이 자신의 밴드에 합류하길 제안한 것이다. 꿈이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과정쯤으로 여겼던 대학은 뒷전이었다. 라이오넬 햄튼의 밴드에서 그가 선보인 편곡에 많은 재즈 뮤지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사라 본와 같은 거장들의 곡을 편곡해주기 시작한다.

 

ABC-파라마운트 레코드는 퀸시 존스에게 계약을 제안하고, 그는 1957년, 자신의 첫 리더작 [This Is How I Feel About Jazz]를 발표한다(2년 앞서 로이 헤인즈와 [Jazz Abroad]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공동 리더작이었다). 앨범 작업을 해보자, 이론의 필요성을 느꼈다. 활동에 밀려 학업을 소홀히 했던 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저명한 음악 교육자 나디아 불랑제와 현대음악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을 만나 작곡과 음악 이론을 공부했다. 음악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편곡과 작곡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의 빅밴드를 꾸려 녹음과 투어를 병행했다. 60년대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당대 최고의 빅밴드 리더로 성장해 있었다. 프레디 허버드, 짐 홀, 레이 브라운과 같은 그 시대 최고의 거장들의 그의 앨범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빅밴드 보사노바 앨범 [Big Band Bossa Nova]도 이 시기에 나왔다. 타임지는 퀸시 존스를 두고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뮤지션 중 하나’로 꼽았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한 프로듀서로서의 전성기


70년대로 접어들자 재즈는 퀸시 존스가 그리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퓨전의 시대'를 맞이했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물론, 퀸시 존스가 빅밴드 운영에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던 터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방향을 달리했다. 편곡가이자 빅밴드 리더였던 퀸시 존스는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키웠다. 알앤비 밴드 브라더스 존슨을 전담하여 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았다. 퀸시 존스가 이끈 앨범 네 장이 모두 플래티넘 레코드을 달성했다. 1980년에는 큐웨스트 레코드를 설립했다. 첫 타자는 조지 벤슨이었다. 그간 소울 재즈와 스무드 재즈의 영역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조지 벤슨은 새 앨범에서 팝 가수로 완전히 전향했다. 발라드에서 디스코까지, 여러 영역을 아우른 이 앨범은 재즈와 알앤비 두 영역에서 찬사를 받았다.

 

실은, 이 시기에 퀸시 존스가 집중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1978년, 영화 [위즈] 작업 도중에 만난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자기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했고, 퀸시 존스가 해갈에 도움을 줄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퀸시 존스 역시 마이클 잭슨의 만개 직전의 재능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앨범이 1979년작 [Off The Wall]이다. 디스코의 최고 전성기이자 끝자락에 발표된 이 앨범은 디스코를 중심으로 한 팝 앨범이었다. 물론, 전 소속사 모타운 레코드의 욕심 때문에 억지로 냈던 솔로 앨범도 있었지만, [Off The Wall]은 확실히그의 음악적 색깔과 정체성이 드러난 최초의 앨범이었다. 사실상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앨범에서도 퀸시 존스의 재즈적인 뿌리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이미 팝에 최적화된 음악가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이후, 퀸시 존스는 [Off The Wall]의 성공에 힘입어 두 장의 앨범을 추가로 작업했다. [Thriller]와 [Bad]가 그것들인데, 이들이 합작한 세 장의 앨범의 대성공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세 작품은 마이클 잭슨에게 ‘팝의 황제’ 칭호를 선사했으며, 퀸시 존스는 팝계 최고의 스타메이커로 떠올랐다.

 



제3의 시대를 열다

 

[Back On The Block]은 1981년에 발표했던 팝 앨범 [The Dude] 이후 8년 만에 처음 발표하는 솔로 앨범이 됐다. 많은 사람이 이 앨범을 단순히 재즈와 힙합의 만남 정도로 평가한다면 그건 그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앨범은 퀸시 존스가 음악인으로 지내온 40년 동안의세월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에 즐겨 듣고 연주했던 비밥, 재즈에 새로운 길을 열어준 70년대 퓨전재즈, 그리고 당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던 힙합까지, 그의 삶을 함께했던 총 세 세대 걸친 음악들을 아우르려 했다.


여러 음악을 집대성한 창의성, 과거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현재와 발맞추려는 노력 등은 앨범의 탄탄한 완성도과 조화하며 하나의 명작으로 완성됐다. 이 앨범으로 퀸시 존스는 1990년에 열린 제32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일곱 부문 후보에 올라 여섯 부문을 수상했다. 상들은 재즈, 랩, 팝, 공통 분과에 고루 이름을 올리며 앨범의 컨셉인 음악적 다양성을 인정받았다. 이날 그는 시상식의 주요상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다.




비밥에서 힙합까지

 

많은 사람은 마지막 세대인 힙합에 이 앨범의 포커스를 맞춘다. 한편, 퀸시 존스가 정말 의미 있게 여기는 것은 첫 번째 세대다. 그가 듣고 자란 음악이자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함께했던 고전 재즈를 말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앨범에는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가 참가했다. 나머지 세 명은 퀸시 존스가 편곡가로 합작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와는 처음이었다. 과거 마일스 데이비스 곁에는 탁월한 편곡가 길 에반스가 있었고, 퀸스 존스로서는 감히 그사이에 낄 엄두가 안 났다고 고백했다.

 

앨범에서 디지 길레스피와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한 존경심은 자주 드러난다. 이들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 한편으론 퀸시 존스의 바람과는 달리, 두 세대 간의 간극은 꽤 컸다. 앨범의 첫 트랙 'Prologue'에서 랩을 맡은 래퍼 빅 대디 케인은 가사에 적힌 이름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마일스 데이비스가 누구예요?”. 이런 일화를 전한 퀸시 존스는 “당시 빅 대디 케인은 겨우 21살의 어린 친구였으니까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처럼 젊은이들에게 이들의 명성은 전설적인 입지와는 별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이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들끼리 보인 반응이다.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녹음실을 찾은 디지 길레스피는 미리 와 있던 엘라 피츠제럴드와 마일스 데이비스를 보고 “이런 노땅들은 뭐야?”라며 불평했다고 한다. 디지 길레스피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동갑이며, 마일스 데이비스보다 15살 많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이 네 명의 거장 외에도 참여진은 정말 화려하다. 샤카 칸, 레이 찰스, 디온 워윅, 베리 화이트, 나단 이스트, 조 자비눌, 조지 벤슨 등 흑인음악과 재즈에서 내로라할 음악가들은 다 모였다. 특히 조 자비눌의 밴드 리턴 투 포에버의 퓨전재즈 명곡 'Birdland'의 편곡 버전은 재즈 마니아들과 평단에게서 찬사를 자아냈다. 그래미 어워드는 'Birdland'에 트로피를 두 개나 내줬다. 또,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역시나 쿨 모 비, 아이스티, 빅 대디 케인 같은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래퍼들의 참여였다. 이들의 랩을 빌리는 수준이었다면, 힙합의 일부를 차용한 수준에 그쳤겠지만, 퀸시 존스는 기존의 연주곡들을 샘플링해서 라이브 연주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힙합의 여러 요소를 두루 활용했다.

 

이 앨범의 참여진을 보고 있으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바로 마이클 잭슨의 부재다. [Bad] 앨범 이후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더 이상 프로듀스하지 않았기에 의문은 더욱 커졌다. 마이클 잭슨이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그의 불참에는 마이클 잭슨의 소속사 CBS의 대표 월터 예니코프의 개입이 있었다는 점을 퀸시 존스가 넌지시 흘린 적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길 꺼리며 그는 이렇게 밝혔다.

 

“마이클 잭슨과 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엄청난 양의 앨범을 팔아치웠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게 이 앨범의 컨셉과 느낌이 확실했기 때문에 그의 부재는 문제가 안 됐어요. 그 어느 구석에서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앨범에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가 참여했잖아요?”




류희성 | 월간 재즈피플 기자

여러 매체에서 음악과 관련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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