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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ODJB로 시작된 재즈 레코딩 100년  
제목 [기획] ODJB로 시작된 재즈 레코딩 100년   2017-02-10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ODJB로 시작된 재즈 레코딩 100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은 재즈사에 있어 너무나 의미 깊은 한해이다. 재즈의 기록물 중 음원으로 존재하는 첫 녹음작이 탄생한 해(1917년 2월 26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수없이 이어질 재즈 거장들의 출생과 타계, 그리고 주옥같은 재즈 음반이 시작되는 첫 계단이다. 또한, 올해는 미국 의회가 재즈를 미국의 문화로 규정짓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며 영화 <스팅>(1973)을 통해 가장 미국적인 래그타임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흑인 피아니스트 스콧 조플린 타계 100주년이자 재즈의 전설 디지 길레스피, 델로니어스 몽크, 엘라 피츠제럴드 탄생 100년이기도 하다. 더불어 재즈 녹음 출시의 100주년이 되는 올해이기에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이하 ODJB)와 함께한 재즈 시작의 수많은 관련 기사 및 자료들의 발표가 예상된다. 필자가 바라보는 재즈 녹음의 시작은 ODJB에 국한하지 않고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 이후 산업화가 된 레코딩의 역사와 래그타임, 뉴올리언스를 통한 초창기 재즈의 관점뿐만 아니라 ODJB가 재즈 첫 녹음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미국의 사회적인 환경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1917년 미국


재즈 레코딩 100년에 대한 글을 시작하고 있지만 사실 1917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이다. 러시아 제국의 멸망에 이어지는 소련의 공산당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트랙에 역행하는 수많은 정치범과 문화인들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시작했다. (요즈음 눈만 뜨면 들려오는 블랙리스트나 '채플린 vs 맥카시'의 100년 가까운 과거가 작금의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니!) 이로 인해 많은 동유럽의 음악인들 역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재즈의 발전과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하다. 재즈 레코딩 100년에 대한 글이기에 논점을 간략한 100년 전의 미국 세상으로 바꿔야겠다.


일단, 1773년 사무엘 아담스 등에 의한 보스턴 티파티 사건 이후 미니트맨 (Minuteman, 독립전쟁 때 즉시 동원 가능한 민병대)과 함께 인지조례 등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식민지 미국의 노력은 영국을 견제하던 유럽 연합군의 도움으로 1781년 요크타운 전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1789년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였다.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이 전 세계에 공표된 이후, 미국의 팽창은 끝없이 진행되었다. 1803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며 기존 영토의 두 배를 확장한 이후 19세기 후반부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과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괌,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점령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성분을 담을 수밖에 없는 재즈의 시작에 너무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재즈의 출발점에 이미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French Quarter)가 18세기 초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이 상업지역에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했던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이다. 그리고 이곳의 다문화주의로 시작된 재즈는 20세기 초반 미 전역으로 확장하는 사회적 계기를 맞이한다. 1915년 5월 독일이 자랑하던 공포의 잠수함 U보트가 128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영국의 호화 여객선 루시타니아호에 어뢰 두 발을 발사하여 민간인 1,198명을 수장시킨 것이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은 이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멕시코와 일본을 부추겨 미국을 고립시키겠다는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의 암호전보가 노출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중립주의 표방과 함께 영국, 프랑스 등 교전국으로의 수출로 많은 실리를 득했던 우드로 윌슨과 토마스 마샬의 미행정부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이는 미국의 많은 노동력을 전쟁터로 보내게 되며 북부 산업 도시의 구인난을 촉발한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의 군사정권 시절 명문고의 강남 이전으로 한강 이남을 활성화한 것처럼 당시의 미국 행정부는 무료기차운임이라는 임시변통으로 흑인들을 북부 산업도시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뉴올리언스의 다문화 재즈는 미국의 재즈, 세계의 재즈가 되었다.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 종말

재즈의 문화 유통의 시작


뉴올리언스의 프렌치쿼터에서 재즈의 시작을 찾는 것은 당연시된다. 유럽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거리 대부분이 2층짜리 건물들로 들어차 있어 스토리빌(Storyville)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당시 이 상업지구는 음악의 녹음이나 재생의 개념조차 없던 시기였기에 라이브 뮤지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루이지애나 영입 이후, 아프리카 노예들의 거래 장소로 더욱 활성화되었던 프렌치쿼터 콩고스퀘어는 그야말로 문화의 수익창구가 될 수 있는 음악시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곳의 춤과 노래는 술, 도박, 매춘 등 미국 최고의 항구도시였던 뉴올리언스의 유흥시장에 뒤따르는 마케팅의 일환이었으며 자연스레 다문화의 융합인 재즈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융합문화의 기획, 제작자로 가장 적합(?)했던 크리올(Creole) 계급이 ‘플레시 대 퍼거슨’ 법안의 판결(1896년)로 노예들과 같은 신분으로 하락하게 되면서 프렌치쿼터의 종말도 시작되어버렸다. 4명의 선원을 살해한 한 살인마의 도주로 미연방정부가 스토리빌을 폐쇄한 해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1917년이다. 이 공간의 철거가 이뤄지기 이전부터 위에 언급한 이유 등으로 뉴올리언스의 수많은 재능인들은 미시시피 강을 타고 캔자스시티, 시카고, 뉴욕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는 재즈의 뿌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버리는 또 다른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이들이 새로이 정착하게 된 곳들에서는 흡사 최근 대한민국 맛집의 원조가게들이 시초의 지명을 거론하듯 당시 미국의 초창기 재즈 연주자들 역시 뉴올리언스라는 브랜드 없이는 연주하기 아니 장사하기 어려웠다. ODJB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Original Dixieland Jass Band

ODJB at Chicago


재즈의 역사적인 첫 녹음을 담당했던 재즈 밴드라는 상징성을 제외하고 사실 이들의 명성은 보잘 것 없다 할 정도이다. 물론, 재즈 첫 녹음의 영광을 차지한 이유로 각종 매체에 끊임없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ODJB의 음악적 반향이나 멤버들의 기량에 대한 언급보다는 이들의 결성에 동반되는 에피소드의 반복만이 눈에 띈다. 그 유명한 일화도 ODJB가 뉴올리언스가 아닌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는 것과 초창기에 ‘Jass Band’였다가 ‘Jazz’로 밴드명을 변경했다는 점 정도일 뿐이다. 재즈의 시작이라는 역사성 때문에라도 침소봉대해야 할 미국의 재즈 관련 자료들조차 이처럼 이들에 대한 큰 정보를 남기고 있지 않다. 오히려 ODJB의 첫 녹음 이전에 분명 언급해야만 하는 몇몇 인물과 지명들이 있다. 특히, 최초의 재즈 연주자로 기록되어 있는 버디 볼든(Buddy Bolden, 1877-1931)은 알코올 중독과 이어진 정신분열로 1907년부터 1931년 타계하기 전까지 정신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재즈 첫 녹음 아티스트의 영광을 빼앗겨 버렸다. 실제로 몇몇 기록들 역시 버디 볼든이 ODJB보다 22년 앞서 재즈를 연주했다고 말한다. 또한, 자칭타칭 '재즈의 창시자'로 불렸던 젤리 롤 모턴(Jelly Roll Morton, 1890-1941)은 1912년부터 뉴올리언스를 벗어나 시카고, 뉴욕 등 대도시에서 연주했음에도 크리올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인지 그 또한 재즈 첫 녹음의 영예와는 함께 하지 못했다.


사실, 재즈 첫 녹음의 주인공이라는 팩트에 가장 가까웠던 선두주자는 버디 볼든의 후계자로 알려졌던 코넷주자 프레디 케퍼드(Freddie Keppard, 1889-1933)이다. 실제로 빅터 레이블은 1916년 프레디 케퍼드에게 녹음을 제의했으나 자신의 음악적 기교와 기술이 녹음을 통한 노출과 그에 따른 표절, 모사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 영광을 거절하는 역사적 우를 범했다. 이외에도 1908년 오리지널이란 밴드명의 오리지널을 창시했던 빌 존슨, 백인 재즈의 아버지로 불리는 드러머 조지 파파 잭 레인, 뉴욕의 라이젠웨버 레스토랑의 400클럽룸(400 Club Room)과 코코넛그로브, 그리고 즉흥연주를 거부했던 음반사 콤럼비아와 그 틈을 파고든 역사적 사실의 승자 빅터 토킹머신 컴퍼니 등은 재즈 100년의 주제에 빠질 수 없는 이름과 단어들이다.


아무튼, 재즈 첫 녹음 100년의 주인공이라는 엄청난 영광은 ODJB에게 돌아갔다. 5인조 콤보밴드인 ODJB는 토니 스바바로(Tony Sbarbaro, 드럼), 에디 에드워즈(Edwin "Daddy" Edwards, 트롬본), 래리 쉴즈(Larry Shields, 클라리넷), 헨리 래가스(Henry Ragas, 피아노), 그리고 밴드의 리더인 도미닉 제임스 ‘닉’ 라로카(D. James "Nick" LaRocca, 트럼펫)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첫 녹음이 시작되기 전후에는 밴드의 리더가 에디 에드워즈였다는 기록도 있다. 1917년 2월 26일 출시된 이들의 ‘Dixieland Jass Band One-Step’과 ‘Livery Stable Blues’는 세계 최초의 재즈 싱글이 되었으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뒤이어 녹음된 ODJB의 오리지널 넘버 ‘Tiger Rag’이나 ‘At The Jazz Band Ball’ 등으로도 그들의 명성을 드높였다.


ODJB의 결성은 조니 스타인(Johnny Stein)이라는 뉴올리언스의 드러머로부터 시작된다. 거스 챈들러라는 배우의 권유로 시카고의 프로모터 해리 제임스와 계약을 체결한 조니 스타인은 이미 큰 명성을 거두고 있던 키드 오리의 편성을 본따서 뉴올리언스의 Papa Jack Laine 밴드 출신의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닉 라로카, 에드워즈, 래가스와 클라리넷 주자 알시드 누네즈를 영입하며 1916년 3월 시카고의 실러(The Schiller)라는 카페에서 첫 연주를 하게 된다. 이 장소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프로모터 해리 제임스는 뉴올리언스의 유명한 펍 카페에서 연주한 뮤지션들이라는 광고를 하였는데 실제로 이전에 공공장소에서 연주 경험이 있던 사람은 조니 스타인이 유일했다. 이들은 일종의 유니폼처럼 더스터스(Dusters)라는 롱코트를 입으며 이전에 뉴올리언스에서 올라온 트롬보니스트 톰 브라운의 브라운스 밴드(Brown's Band)와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재즈라는 단어의 근원에 여러 설이 존재하며 또 그 의견도 분분한데, 톰 브라운의 밴드가 ‘Jaz, Jazz Band’라는 표현으로 뉴올리언스 출신의 시카고 음악이라는 아이덴티피케이션을 가지려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아무튼 조니 스타인의 밴드 역시 1916년 5월부터 'Jass Band'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Jazz로 변경한 이유가 Jass에서 J를 빼면 Ass(궁둥이)가 되는 놀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름 시카고 내에서 명성을 가지게 되고 뒤이어 임금인상 요구를 하게 되는데 해리 제임스와 조니 스타인은 난색을 보였다. 이에 조니 스타인을 제외한 ODJB의 멤버들은 모두 사표를 던지고 실러를 떠나게 된다. 이후, ‘키드 스팔고’라는 예명을 지닌 에디 에드워즈의 뉴올리언스 음악 동료 토니 스바바로가 드러머로 영입되고 개인적, 음악적 견해 차이로 클라리넷 주자가 래리 쉴즈로 바뀌게 되면서 ODJB의 틀을 구축하게 된다.




Original Dixieland Jass Band

ODJB at New York


사실, 위에 언급한 ODJB의 일화들은 재즈의 역사에 빠지는 법이 없다. 당연히 재즈 녹음의 첫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덴마크 출신의 A&R 에이전트 맥스 하트라는 이름이 ODJB의 첫 레코딩 일화에 등장하는 기사나 자료를 적어도 필자는 본 적이 없다. 리얼북에 수없이 등장하는 로저스 & 하트의 주인공 로렌즈 하트의 아버지가 맥스 하트이며 그가 ODJB를 뉴욕으로 초청한 장본인이다.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 남북 전쟁 전후에 유행했던 쇼 중 하나로 얼굴을 검게 칠한(Blackface) 백인 등장)의 대표적 인물이자 영화 <재즈싱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알 졸슨의 중계로 맥스 하트와 ODJB가 1916년 10월부터 접촉한지 3개월 만에 뉴욕 맨해튼의 8번 애비뉴와 58번 스트리트 사이에 자리한 뉴레이젠웨버(The New Reisenweber) 건물의 작은 레스토랑 400클럽룸에서 데뷔한다. 이후 1917년 1월 29일 콜롬비아로부터 녹음 제안을 받게 한 것 역시 맥스 하트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많은 기록들이 세상에 남긴 것처럼 콜롬비아 컴퍼니는 ‘Darktown Strutters Ball’과 ‘Indiana’라는 두 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별것 아닐 수도 있는 불협화음과 즉흥연주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을 걱정한 레이블 고위층의 기우로 콜롬비아와 ODJB의 계약은 무산되었고 한 달 후인 1917년 2월 26일 빅터 토킹머신 컴퍼니에 의해 재즈 첫 녹음이 이루어졌다. Victor 18255의 제품번호로 A면에는 작곡, 연주 ‘Original Dixieland 'Jass' Band’라는 크레딧 명기와 ‘Dixieland Jass Band One-Step’이라는 곡이 B면에는 ‘Livery Stable Blues’가 수록되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회의 가치를 정하고, 그 질서를 만들어 형식을 창조해내는 사제가 문화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데 비하면 예술가는 단지 여론의 한 부분일 뿐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얻을 수도 없고 기능도 발휘할 수 없다.” 재즈의 출발점이 되었던 래그타임은 예술도, 철학도 아닌 단순한 댄스 음악이었다. 그럼 이 재즈의 시작은 사제란 말인가? 너무나 어려워진 트랩 위주의 EDM에 박자 맞추기도 어려울 정도이지만 대중들은 이 트렌드에 열광하듯, 적어도 예전의 사회 또한 상류 계급의 기득권적 문화행위를 대중이 쫓아가는 형국이었다.




20세기 이전, 미국의 사교클럽은 유럽의 답습에 불과했다. 2, 4 박자의 행진곡이나 군가에서 탈피하기 위해 시작된 3박자의 왈츠를 통한 스킨십은 20세기 이후, 대중들에게 애니멀 댄스로 변형되어 성적 어필의 대담한 표현에 이르게 된다. 이에 적합한 싱코페이션된 래그타임은 125인조의 클레프 클럽 오케스트라를 탄생시켰고 재즈의 첫 녹음이 시작되기 20년 전부터 래그타임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했던 스콧 조플린은 아이러니하게도 재즈의 첫 녹음이 진행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재즈의 첫 녹음작인 ODJB의 ‘Dixie Jass Band One-Step’ 역시 래그타임곡이다. ‘A-B-A-B-C-C’의 전형적인 행진곡, 래그타임의 구성으로 폴리포니(Polyphony,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2성부 이상의 멜로디가 대위를 이루는 음악 형식)를 통한 반복적인 리듬, 멜로디, 화성의 강조는 단순함 속에 생각지 못한 즉흥적 일탈의 요소를 가미하여 그 당시 젊은 귀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이 언급은 100년 전 과거에 국한되어 있을 뿐 지금의 청자들이 이 곡의 오리지널 버전을 듣지 못한 요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20세기 초기의 레코딩 기술과 산업


1877년 에디슨에 의해 발명된 축음기, 포노그래프는 하드웨어의 판매로 그 상업적 수익 창구를 확보하게 된다. 이 인류의 이기가 발명될 당시에는 토킹머신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속기사의 대용, 현재 우리의 스마트폰에 담긴 음성녹음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던 듯하다. 1887년 베를리너가 그라마폰이라는 원반형의 축음기를 개발한 이후, 이듬해인 1888년 콜롬비아 포노그래프 컴퍼니가 그 하드웨어 판매의 창시로 기록되고 있다. 이 하드웨어에 필요한 콘텐츠인 음반이 제작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13년이 지나서이다. 콜롬비아 외에 빅터사 역시 빅터 토킹머신 컴퍼니라는 상호로 음반 제작, 판매를 개시한다. 1902년 그라마폰 & 타이프라이터 컴퍼니 소유의 뉴욕 녹음실에서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인류역사 최초의 음반 녹음이 이루어졌다. 100파운드의 개런티로 당시 신인급 아티스트였던 엔리코 카루소가 마이크 없이 (당시에는 발명전이었다) 집음 나팔 앞에서 노래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과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rgrima) 등 10곡의 녹음 음반은 15,000 파운드라는 150배의 수익을 올렸다.


이에 너나없이 음반이라는 신상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몰두하게 되고 이는 새로운 유통 시장으로, 그리고 일확천금을 거두는 산업화로 성장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이다. 사실 악보 시장에서 음반으로 음악 창작에 대한 결과물이 활성화된 시점은 1930년대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당시부터 기획자, 작품자, 연주인, 프로모터, 유통사 등에 대한 배분의 원칙이 너무나 잘 지켜졌다는 점이며, 이에 선행되는 다양한 프로젝션이 각 파트의 대표들의 협의와 인정에 따라 정해졌다는 것이다. 현재 재즈를 포함한 음악시장의 문제는 온라인, 디지털로 통칭되는 패러다임과 구성의 변화, 그리고 그 적절치 못한 분배 때문이다.




재즈 녹음 100년이 지난

작금의 재즈가 나아가야 할 길


최근, 필자의 후배와 제자들인 몇몇 현역 음악인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 음원 한 곡의 마스터링 마감 후 뒤풀이 장소로 향하는 것을 보며 아무래도 뭔가 작업의 마무리를 못한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음반이라는 결과물 없이 스트리밍으로 그 끝을 본다는 것은 정말. 아직도 이건 아니다 싶다. 8곡 이상이 수록된, 그리고 40분 이상의 음악이 포함된 앨범 작업은 흡사 갤러리에서 열리는 미술의 전시회처럼 작품자, 창작자가 수없이 고뇌하고 만들고 허문다. 그 짓을 반복 또 반복하며 만들어 낸 아티스트의 피와 땀이다. 그 발표의 시, 공간이 기존의 싸구려 리듬 루핑을 깔고 쌍욕으로 범벅된 라임 위에 엉성하게 존재하는 것만은 절대 아니다. 재즈가 즉흥연주라고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도 아니다. 국내 출시작들의 재킷 디자인이 성의 없이 만들어지는 아쉬움도 제작비의 부족으로만 이해해줄 수 없다. 그래도 같은 편이라 음반이 팔리지도 않는 제품으로 규정하고 있는 시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머릿속에서만 중얼거려본다. 음반을 발매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니냐는 생각이 얼마 못 가는 것도 그 작업들이 전임교원을 유지하기 위한 포트폴리오로만 남지 않을까 하는, 아직도 고치지 못한 성난 필자의 마음씨 때문이다. ODJB의 이 녹음이 재즈가 사라지기 전까지 세상에 언급될 수밖에 없는 것 같은 행운을 잡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창작은 계속 되어야 한다. 로또를 사야 로또가 당첨될 수 있는 것처럼.  



이영주 | 음반 프로듀서

버클리음대에서 프로덕션 과정을 전공했으며

각종 음반의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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