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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재즈] 버닝 × Générique  
제목 [영화 × 재즈] 버닝 × Générique   2020-06-02


김민주


FILM

버닝

| 감독: 이창동

| 연도: 2018


JAZZ

Générique

| 작곡: 마일스 데이비스

| 원곡: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


*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닝〉

새로운 음악적 연출이 돋보이는

이창동 감독의 야심작


이창동 감독은 영화에서 쓰이는 음악을 신중하게 대하는 감독 중 하나다. 그는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번 사용하기로 결정하면 그 음악이 영화 속에서 반드시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박하사탕〉(1999)을 기억해 보자. 이 영화는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가 강가의 한 야유회에서 이동 노래방 마이크를 붙잡고 울부짖듯 노래하는 일련의 시퀀스로 시작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되겠지만, 그는 젊은 시절 5·18 진압군과 고문 담당 경찰로 일하며 국가 폭력의 가해자로 살다가, 훗날 직업도 잃고 가족도 잃고 오랜만에 소식이 닿은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마저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채 야유회를 찾았다. 그가 여기서 부르는 노래는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 버리면 / 나 어떻게 너를 잃고 살아갈까”


〈밀양〉(2007)에서 불쑥 등장하는 음악도 범상치 않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아들이 유괴된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고통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해 나간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으며 지독한 슬픔 속에서 조금씩 희망을 찾아가던 중,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 ‘도섭(조영진 분)’ 역시 신 앞에 회개하고 평안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고 그 자리를 배신감과 증오로 채운 그녀는 동네 교회 부흥회에 잠입해 목사의 기도 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스피커로 튼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버닝〉(2018)은 다르다. 주로 선명한 노랫말과 멜로디가 특징적인 한국 대중가요를 정확한 순간에 최소한으로 삽입하기를 고집해 온 이창동의 선택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이라면, 〈버닝〉이 음악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경함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오프닝 시퀀스에서 ‘해미(전종서 분)’가 내레이터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안무 음악으로 등장한 씨스타의 ‘Touch My Body’가 기존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곡만으로는 이 작품에서 이창동 감독이 영화음악에 관해 선보인 다른 새로운 시도들을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하나의 특정한 음악적 모티프를 다양하게 변주해 구성한 음악감독 모그(Mowg)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들이 영화 속에서 과잉이라고 느껴질 만큼 반복적으로 삽입된 것은 이창동 감독이 다른 영화에서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음악 연출이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님께 과연 가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새로운 변화 속에서 그에게 ‘젊은’ 야심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선보인 가장 놀라운 음악적 시도는 바로 영화 속에 재즈를 소환하는 방식에 있다. 물론, 부유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물인 ‘벤(스티븐 연 분)’의 계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공간에 재즈가 흐르도록 연출한 건 지금껏 수많은 국내외 감독들에 의해 시도된 클리셰다. 지금 이야기하는 건, 국내 재즈 팬들에겐 이미 널리 알려진 명장면이기도 한, 해미의 춤 장면에 삽입된 마일스 데이비스의 ‘Générique’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버닝〉보다 60년 전에 개봉된 루이 말 감독의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를 소개해야만 한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 마일스 데이비스이고, 이 영화를 위해 작곡된 곡 중 하나가 ‘Générique’이기 때문이다.




‘Générique’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이끌어 나가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


〈버닝〉에서 모그가 취한 전략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취한 전략과 같다. 즉 마일스는 하나의 음악적 모티프를 변주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 간다. ‘Générique’는 영화 속에서 맨 처음 삽입된 곡은 아니지만 영화 OST 앨범에서 첫 번째 트랙에 실려 있는 곡이다. 프랑스어로 쓰인 제목의 의미가 우리말로 ‘일반적인’, ‘총칭적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곡이 영화 속 음악적 세계관 전반을 총괄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마일스는 이 곡에서 잉태되어 모든 사운드트랙에서 반복되는 관능적인 키 멜로디라인을 중심으로, 차분한 연주와 격렬한 속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영화음악 역사에 매력적인 획을 그었다.



어떻게 이 프로젝트가 전문 영화음악감독이 아닌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의뢰되었을까? 배경은 이러하다. 국내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온 영화감독 장-폴 라프노가 당시 루이 말의 조감독으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평소 재즈를 좋아하던 그는 이 작품이 의도하는 프렌치 누아르 분위기에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장-폴 라프노는 곧장 루이 말에게 마일스 데이비스를 소개했고, 루이 말이 제안에 동의했다. 영화 제작이 한창 진행되던 때가 1957년이었는데, 같은 해 초에 발표된 로제 바댕 감독의 영화 〈아무도 알지 못한다(Sait-on jamais…)〉에서 모던 재즈 쿼텟의 존 루이스가 사운드트랙 전체 작곡을 맡아 화제가 된 것이 아무래도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게 비평가들의 주된 견해다. 결론적으로 그 영화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혔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가 프랑스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살아남았다.


루이 말 감독은 영화 안에서 재즈 음악을 쓰기로 결정한 만큼 사전에 작곡된 연주보다는 즉흥연주로 모든 사운드트랙을 구성하고 싶어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영화를 여러 차례 감상하면서 즉흥연주의 바탕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곧바로 퀸텟 밴드를 갖췄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영화인 만큼 밴드의 구성 역시 드러머 케니 클락을 제외하고 모두 프랑스 뮤지션들로 꾸렸다. 색소폰에 바르네 윌랑, 피아노에 르네 우르트레제, 베이스엔 피에르 미쉘로.


1957년 12월 4일 밤 11시부터 이튿날 5일 새벽 5시까지, 단 6시간 만에 마친 이들의 녹음은 오늘날까지 재즈계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당시 스튜디오에는 감독 루이 말과 배우 잔느 모로가 와 있었다고 하는데, 마일스 데이비스를 포함한 연주자들 모두 녹음 중간중간 그들과 함께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앨범을 들어 보면 12월의 차가운 새벽안개 감촉과 샴페인이 자아낸 몽롱한 취기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버닝 × Générique

미스터리 서사의 불길함을 극대화하는

음악적 메타포


다시 〈버닝〉으로 돌아와 보자. 〈버닝〉은 작가 지망생 종수의 관점에서 쓰인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종수의 소설 속 세계로 해석할 수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끝나는 영화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이 영화가 한 청년의 작가 입문기라고 요약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침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수는 왜 글을 쓰지 못했던 걸까. 종수의 대답은 이러하다. “저는 뭐를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그렇다. 종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내막을 좀처럼 쉽게 알 수 없어서 글을 쓰지 못했다. 알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성질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이창동 감독은 종수의 이러한 상태가 지금의 밀레니얼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고통의 본질이라고 보고 있다. 본인이 젊은 시절에 겪은 시대는 계급의 문제든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든 문제와 답이 명확히 보이는 것 같은 시대였지만, 요즘 청년들은 뭔가 잘못돼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잘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영화 〈버닝〉을 만들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니까, 이야기를 미스터리 서사로 전개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버닝〉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세계관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가 채택하는 수사법은 다름 아닌 메타포, 즉 은유법이다. 비슷한 성질이나 모양을 가진 두 사물을 직접 빗대는 직유법과 달리, 은유법은 서로 성질이 다르거나 상관없는 것을 빗대 하고 싶은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귤을 먹는 시늉을 하는 해미의 팬터마임도, 해미의 방 안에 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고양이도, 하루에 잠깐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햇빛도, 종수에 집에 걸려 오는 정체 모를 침묵의 전화도,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우물도 모두 의미심장한 메타포로 기능하며 작품의 주제의식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유가 넘치는 이 영화 속에서도 지나치게 선명한 직유가 등장하는 때가 있으니, 그건 모두 ‘해미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순간에서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에서 노을 풍경을 바라보던 때를 회상하며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고, 벤은 실제로 해미가 사라진 뒤 해미를 찾는 종수에게 “해미는 사라졌어요, 연기처럼”이라고 말한다. 해미는 정말 노을처럼 혹은 연기처럼 사라진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한 직유로 이해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의 사라짐에 대해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은유들이 영화 곳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선명한 것부터 살펴보자. 첫 번째 메타포는 벤이 종수에게 고백한 악취미다. 두 달에 한 번씩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찾아 태워 버린다는 것. 종수는 벤이 범행할 것이라고 예고한 파주 농가의 비닐하우스들을 매일 찾아다니면서 아무것도 태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후에 벤은 종수에게 이미 비닐하우스를 하나 태웠다고 말한다. 불길하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겠다고 고백한 이후 해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해미가 벤을 만난 지 두 달쯤 된 것 같은 시점에 그의 곁에 이제 해미가 아닌 새로운 여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벤의 악취미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연쇄살인을 의미하는 끔찍한 메타포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관객들 마음 속에 서서히 피어난다.


벤이 종수와 해미를 반포에 있는 고급 아파트에 초대해 요리를 하면서 해미와 나눈 대사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그 의심은 아주 합리적인 것이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어서야.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내가 그걸 먹어 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 “제물?” “제물은… 말하자면 그냥 메타포야.”


이제 남은 건 가장 희미하지만 어떤 것보다 강렬한 메타포다. 벤과 해미가 파주에 위치한 종수의 집에 찾아와 대마초를 나누어 피우고 난 뒤, 해미가 상의를 완전히 벗고 춤을 추기 시작할 때 벤이 카오디오로 재생한 음악, 바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Générique’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단순하고 선명하게 직구를 던지는 음악들과 달리, ‘Générique’는 원작의 예술적 맥락을 활용해 입체적인 변화구를 던진다.


우선 이 곡이 쓰인 원작의 제목이 ‘사형대’라는 불길한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들에게 이것만큼 무시무시한 메타포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삽입곡에 대한 정보를 모른다고 해도 괜찮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서늘한 트럼펫 연주가 그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음악을 왜 인용했는지에 대한 예술적 호기심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답이 숨어 있다. 그건 바로 영화 서사에 관한 이창동 감독의 작가적 고민이 담긴 메시지다. 즉, 강력한 서스펜스 서사로 관객들에게 스릴을 제공하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인용함으로써, 서스펜스 서사와 반대 성질을 지니고 있는 미스터리 서사를 강조해 〈버닝〉의 예술적 형식미를 극대화한 것이다.


무섭다고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결단,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적확하고 매력적인 음악적 메타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국내 첫 수상의 영광이 〈버닝〉에 먼저 주어졌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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